▲열여덟 점원으로 시작해 삼화상회 주인이 된 김성준씨.
경북매일 자료사진
32년과 53년.
"성공하려면 한 우물을 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앞의 문장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격언처럼 오랜 시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것일 터.
살아오는 내내 같은 일을 하며 삶의 절반 혹은, 2/3 이상을 보낸 이들을 볼 때면 경이와 존경의 마음이 함께 돋아난다. 길고도 긴 시간이 주는 압도적인 감정에 기가 질릴 때도 있다.
포항제철이 <포스코신문>을 발행하던 지난 2010년. 원고 청탁을 받고 인천에 있는 포스코 협력사를 찾아갔다. 철광석에서 주철을 만들어내는 제철소의 고로(高爐). 그 고로의 핵심 설비부품 중 하나인 풍구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거기서 32년을 일한 사람과 만났다. 섭씨 450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풍구 반제품을 앞에 두고 용접을 하며 그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열기를 견디지 못한 팔뚝에 물집이 잡히는 작업.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공장에 들어간 32년 베테랑 용접공은 "시간이 빠르다. 올해 내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니…"라며 웃었다. 터무니없이 맑고 환하던 그 미소가 12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주 죽도시장에서 김성준(71)씨를 만나 악수를 했다. 삼화상회라는 이름의 생활용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그는 "같은 장소, 같은 가게에서 53년을 일했다"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앞의 용접공보다 21년이 더 길다. 그 정도 세월이면 김성준 대표가 파온 '한 우물'은 누구도 깊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들 듯하다.
열여덟 소년 점원에서 삼화상회 주인이 되기까지
1960년대 후반. 경북 경주시 양북면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낸 '소년 김성준'은 포항으로 이주해 죽도시장 조그만 잡화점에 점원으로 취직한다.
당시 죽도시장엔 세찬 비와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차양막이 드물었다. 뿐이랴. 장마철이면 주변 거리가 온통 질척거리던 시절.
그 당시 대부분의 소년 노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씨 역시 부지런히, 열심히, 가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했다. 요즘 같은 주 5일제 근무는 물론, 일요일 휴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던 시대다.
우산과 빨래집게, 수세미와 양말 등 비교적 저렴한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많은 양을 주문한 고객들에겐 집으로 배달도 해줬다. 연탄집게와 고무신처럼 지금은 보기 힘들어진 물품도 잘 팔리던 때였다.
국경일이고, 일요일이고 없었다. 가게 주인이 "오늘 고생했다. 내일은 쉬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매일 출근하는 생활이 오래 반복됐다. 젊음이라는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21세기 청년노동자들이 지향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란 단어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던 한국의 1960~1980년대.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20년을 점원으로 살아온 '청년 김성준'이 힘들게 아껴 모은 돈으로 자신이 일하던 잡화점을 인수했다.
나무로 만든 낡은 건물을 콘크리트를 사용해 다시 짓고, 새로운 간판을 달았다. 대대적 재건축이었다. 김 대표가 점원에서 '삼화상회' 주인이 되던 순간이다.
- 점원에서 주인이 된 후 가장 좋았던 건 뭔지.
"지금은 아침 8시에 가게 문을 열고 저녁 7시엔 닫는다. 11시간쯤 일하는 건데, 이것도 짧지는 않다. 토요일엔 영업을 하지만 일요일은 무조건 쉰다. 나는 교인이고 교회에 가야하니까. 점원일 때는 설과 추석을 제외하면 거의 365일 쉬지 못했다. 왜냐고? 점원이 제 마음대로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웃음)"
- 대형 마트와 인터넷을 통한 물품 거래가 일상화되면서 재래시장 생활용품 판매점 운영이 어려울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활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나이도 있고 해서인지,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하다. 다만 오랜 세월 우리 가게를 찾아준 손님들을 위해 앞으로도 문을 닫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젠 어딜 가도 구입하기 쉽지 않은 참빗과 비녀 등을 찾는 할머니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