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Op.68 No.16빠르기말은 독일어로 Nicht schnell(빠르지 않게)이며, 메트로놈 기호는 분당 4분음표 96회로 지정되어 있다.
임승수
보다시피 빠르기말은 독일어로 'Nicht schnell'(빠르지 않게)이며, 메트로놈 기호는 분당 4분음표 96회로 지정되어 있다.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니 '빠르지 않게'라는 악상기호의 의미가 한층 무겁다. 메트로놈 앱으로 분당 4분음표 96회 속도를 가늠해 보니 내 중학교 때 연주 속도보다 느리다. 아들의 죽음과 연관된 곡이니 다소 느리게 연주하는 게 맞겠지.
프로 연주가들은 어떤 템포로 연주하는지 궁금해서 유튜브로 몇몇 연주를 찾아 들었는데, 대부분 메트로놈 지시보다도 더 느리게 연주하고 있다. 어? 이상한데?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다양한 악보를 무료로 볼 수 있는 IMSLP 사이트에 접속해, 슈만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1849년 출판 악보, 그리고 1887년 출판 악보(아내 클라라 슈만이 편집)를 살펴보았다. 해당 악보에는 메트로놈 기호가 없고 'Nicht schnell'(빠르지 않게)만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메트로놈 기호는 나중에 어떤 악보 편집자가 임의로 넣었구나. 여러 판본 악보를 교차 검증하며 철저하게 고증하는 프로 피아니스트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슈만이 지정하지 않은 메트로놈 기호를 걸러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곡가 슈만의 의도이니까. 확실히 분당 4분음표 96회라는 속도조차 아이를 잃은 아픔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빠르다고 느껴졌다.
자, 어떤가? 슈만의 피아노 소품에서 제목, 빠르기말, 메트로놈 기호만 해석하는 데에도 슈만의 삶을 들여다봐야 하고 출판된 다양한 악보를 교차 검증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 볼까?
포르테피아노... 여기서 슈만의 의도는 뭘까
곡의 서두부터 독특한 셈여림기호가 등장한다. fp(포르테피아노)인데, 슈만이 일부러 신경 써서 적어넣은 것일 테다. 첫 음만 포르테로 연주하고 이어지는 음은 피아노로 연주하라는 지시다. 이 곡에 적용하자면 솔-파#-미-레#-미에서 첫 음인 '솔'만 포르테로 연주하고 이후로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피아노로 연주하라는 의미다.
중학교 때처럼 뭐 그런가 보다 하며 기계적으로 연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무심코 넘어가기에는 생각이 많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나는 이 곡이 '못갖춘마디(음악에서 박자의 첫박 이외의 박, 즉 여린박에서 시작되는 마디)'라는 점과 연결해 fp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서양 음악에 못갖춘마디 곡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 지역 언어와 연관이 깊은데, 그들의 문장을 보면 관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A boy falls in love with a girl.
이 문장으로 노래를 부른다면 대체로 맨 앞의 관사 'A'보다는 다음에 나오는 'boy'가 중요한 단어일 것이다. 음악 시간에 배워 알다시피 3박자는 '강-약-약', 4박자는 '강-약-중강-약'으로 첫밗이 강박이다. 만약 'A boy falls in love with a girl'로 갖춘마디 곡을 지으면 'A'가 강박에 배정된다. 이것은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못갖춘마디일 경우는 'A'가 약박에, 'boy'는 다음 마디 첫밗인 강박에 배정된다. 이렇듯 서양 언어 구조의 특징 때문에 그들의 음악은 못갖춘마디 곡이 많다.
슈만의 이 소품도 못갖춘마디이니, 별다른 지시가 없다면 '솔-파#-미-레#-미'에서 첫 음인 '솔'은 약박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파#'이 강박에 배정된다. 자연스럽게 강박의 '파#'을 조금 도드라지게 연주하게 된다. 하지만 슈만은 멜로디가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첫 음 '솔'에 fp를 표기해 못갖춘마디지만 첫 음을 신경 써서 약하지 않게 연주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 판단이 맞는다면 fp 표기는 그저 첫 음을 세게 치라는 의미라기보다, 못갖춘마디라는 이유만으로 첫 음을 허투루 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솔'을 단순히 크게 치기보다는 적합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준으로 연주하는 게 오히려 슈만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을까. 'A boy'를 발음할 때 앞의 'A'를 'boy'와 동등한 비중으로 발음하는 식으로 말이다.
fp에 대한 해석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이제 주제 선율로 시선을 옮겨보자. 곡은 전체 32마디이며 A-B-A′의 단순한 구조다. 도돌이표를 충실하게 지키더라도 채 2분이 걸리지 않는 소품이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탄탄한 구성미와 조형미가 깃들어 있다. 주제 선율에 등장하는 모티브가 내내 곡의 뼈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다음 악보에 그 모티브를 따로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