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 22일 <동아일보>는 김승훈 당시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은폐했다'고 밝힌 내용을 보도했다.
동아일보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군부독재의 '위기경보'였다면 1987년 초에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최고장'이었다. 집권 7년 째가 되는 전두환 일당은 갈수록 포악성이 더해가고 저항하는 민주세력의 응징력도 이에 비례하였다. 이 해의 주요 사건을 보자.
1월 14일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월 3일 -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평화대행진'이 경찰 저지로 무산되자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가두시위
4월 13일 - 전두환, 특별담화 통해 개헌논의 유보,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 발표
5월 6일 - 서울 지역 23개 대학 대표들이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
5월 18일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5월 27일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
6월 10일 - 국민운동본부, 전국 24개 도시에서 6.10 국민대회 동시 개최
6월 18일 - 국민운동본부, 전국에서 최루탄 추방대회 개최
6월 26일 - 국민운동본부,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개최
6월 29일 - 민정당 대표 노태우, 6.29선언
7월 9일 - 이한열 군 영결식
8월 17일 - 현대그룹 6개 노조 노동자 3만여 명이 회사 측의 휴업조치에 반발해 가두시위
8월 22일 -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
9월 17일 -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10월 12일 -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통과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당선
12월 18일 - 경찰, 부재자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며 서울 구로구청에 농성 중인 시민ㆍ학생 1000여 명 강제 해산
1987년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악의 세력과 정의를 가치로 삼는 양심세력이 정면으로 맞붙는 해가 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시기 양심 세력의 구심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힘이 없고 의지할 데가 없고, 진실을 제대로 밝혀줄 곳으로 사제단을 찾게 되었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아졌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실에서 조사받던 박종철 군이 물고문 등으로 숨졌다. 치안본부 박처원 대공담당 5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망언을 진상이라고 발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월 24일 '고문살인의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이란 〈성명서〉에서 '살인정권'의 만행을 고발했다.
"1.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2. 고문 사건의 책임자는 엄단되고 고문수사기관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3. 전두환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마음을 비우고 퇴진해야 합니다. 4. 이 땅은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