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 및 제3회 광복절 기념식(자료사진).
대통령 기록관
부녀국은 미군정이 1946년 9월 14일 공포한 부인국 설치령에 기원을 뒀다. 보건후생부에 설치된 부인국이 대한민국정부 하에서 부녀국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부서는 노동·복지·보건·공직진출·참정권·여행안전·부랑부녀·성매매여성 등의 다양한 사무를 관장했다. 20세기 들어 한층 고조된 여성의 힘이 미군정기의 부녀국 설치를 추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전 수구세력은 부녀국의 존재가 못마땅했다. 오늘날처럼 그때도 여성 혐오론을 조장하며 부녀국 폐지론을 퍼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사사오입 개헌에 편승한 부녀국 폐지 시도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혐오론을 퍼트린 것은 개인적으로 여성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필요가 이유였다. 2016년에 <역사문제 연구> 제35호에 실린 허윤 이화여대 초빙교수의 논문 '냉전 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는 "한국전쟁과 정전협정, 급속하게 진행된 미국화와, 북한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반공주의 등 냉전체제가 만들어내는 질서는 사회를 통치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여성혐오를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냉전 유지 도구로 쓰인 '여성 혐오'
냉전을 유지·강화하는 도구로 북한 및 김일성 혐오뿐 아니라 여성 혐오도 활용됐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를 조장한 것은 '군복 입고 공산세력과 싸우는 남성상'을 띄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냉전에 동원되는 남성 군인의 이미지를 신성화시키고자 여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것이다. 위 논문은 여성학 학자 정희진의 글을 인용하면서 "친미반공 군부독재세력이 주도하는 호전적 남성성이 전후(戰後) 한국사회를 지배"한 결과로 여성 혐오가 부추겼다고 설명한다.
그런 정치적 동기에서 여성혐오론을 확산시키고자 부녀국 폐지를 추진했지만, 자유당이 겉으로 표방한 명분은 당연히 사뭇 달랐다. 사사오입 개헌 5일 뒤인 1954년 12월 4일 <동아일보>는 자유당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보도하면서 개정 원칙 중 하나기 "중앙행정기관을 대폭 조정·간소화하여 상호간의 중복·마찰을 해소하고 행정사무의 신속·원활을" 기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원칙 하에 내놓은 방안이 부녀국과 원호국을 묶어 후생부 사회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상이군경 지원 등을 수행하는 원호국의 역할도 소중하지만, 원호국과 부녀국의 통합이 원호국에는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되고 부녀국에는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개정안이었다.
행정사무의 신속·원활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원호국과 부녀국의 통합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조정 방안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 여성 관련 사무를 어떻게 유지해 가느냐를 고민하기보다는, '부녀국 폐지' 자체를 서두르다 보니 그런 방안이 나오게 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에는 여성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남성들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지만, 여성들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이 입는 불이익은 한둘이 아니지만, 이 당시에는 남편을 잃은 여성들의 경제 문제가 특히 심각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휴전 1개월 뒤에 보도된 1953년 8월 26일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30만 명에서부터 50만 명까지로 추산된다는 전쟁미망인들의 구호 내지 선도 문제는 아직까지도 구호행정에 선행하는 통계조차 잡지 못한 형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여성 문제의 일부만을 다룬 이 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전쟁 직후에는 국가가 여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런 시기에 자유당이 부녀국 폐지를 추진했던 것이다.
"어쩌려고 폐지하려느냐" "언어도단"... 격렬한 반대 부딪히다
일자리나 재산이 생기는 것만으로 개인의 경제력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경제력을 높이고 그것을 유지하자면 정치적·사회적 지위의 상승과 법률제도의 개선도 함께 수반될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피폐된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려면,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회 전체의 혁신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유당은 거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엉뚱하게도 부녀국 폐지를 시도했다. 사사오입 개헌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자 그 힘을 거기에 사용했던 것이다. 사회 곳곳을 남성 중심의 냉전질서로 신속히 바꿔야 한다는 조급증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