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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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단골집이 된 서울의 주점이 있다. 예전에, 여러 종류의 맥주가 펼쳐져 있는 그 집의 메뉴판에서 어떤 맥주를 마실지 고르다가 낯선 이름을 접했다. 'IPA'. 무슨 맛이 나는 맥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시켜보기로 했다. 새로운 것을 호기롭게 도전해서 나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묘했다. 분명히 과일이나 풀 같은 향이 나는데, 맥주치고는 맛이 너무 썼다. 도수도 꽤 높았다. 한 잔만 마셨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맛있는 맥주는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 강렬한 첫 만남 이후, 나는 마트나 편의점에 갈 때마다 'IPA'라는 세 글자를 찾아 헤맨 것이다.
IPA란 페일 에일(Pale Ale)을 강화한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의 줄임말이다. 영국이 식민지 인도로 맥주를 운송하는 동안, 맥주의 변질을 막기 위해 홉(Hop)을 듬뿍 넣으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과정에서 풍미는 강해지고, 알코올 도수 역시 높아졌다.
20세기 후반, 시에라 네바다 등을 중심으로 크래프트 맥주의 부흥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IPA는 크래프트 맥주에 빼놓을 수 없는 맥주 스타일이었다. 홉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풍미가 크래프트 맥주를 대기업형 맥주와 차별화시켰기 때문이다.
새로운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잡 미묘한 홉의 향과 쓴맛을 지닌 IPA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IPA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발전했다. 201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미국 동부를 기점으로, 홉(Hop)으로 만들어낸 열대 과일과 같은 풍미를 자랑하는 '뉴잉글랜드 IPA'가 맥주 신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내가 요즘 가장 즐겨 마시는 맥주 스타일 역시 뉴잉글랜드 IPA다.
그러나 이따금 보다 고전적 스타일인 '웨스트 코스트 IPA'가 떠오를 때가 있다. 197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양조장 '앵커 브루잉'이 독립 전쟁 200주년을 기념하는 맥주 '앵커 리버티 에일'를 고안하던 도중, 영국산 홉이 아니라 케스케이드 등 미국산 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이것이 웨스트 코스트 IPA의 시발점이다.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웨스트 코스트 IPA는 송진향과 캐러멜의 단맛, 강한 쓴맛 등을 주된 특징으로 삼고 있다. 많은 사람이 IPA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맛이기도 하다.
IPA 역사의 한 페이지, 라구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