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호 시인의 시집
북인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시가 더 좋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시란 시인이 쓰지만, 그것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상처이든 아픔이든 시인의 삶을 깊숙이 안고 있는 시가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고 믿습니다. 울림이란 마음과 마음의 공명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詩)는 화자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태 짊어지고 있던 불행을 더 끌어안으라고'요. '보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불행을 여태 짊어지고 있는 것도 괴로울 것인데 어떻게 더 끌어안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라면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여태 저 불행을 짊어지고 있었으니 이제는 놔버리라고. 이것이 상식적인 말이겠지만, 시인에게 있어서 저 불행은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저 불행이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기막힌 소리이냐고요. 저 불행에 기대고 집중해야만, 깊이 파고 들어가야만 시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인의 불행은 독자의 행복일 수 있다'라고요.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 가슴에 남은 많은 시들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요.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시인의 평범한 심상으로 기가 막힌 시를 썼을 수 있을까요. 몇몇 시는 그러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아는 다수의 시는 극한 고통, 공포, 인내의 상태에서 온 시입니다.
물론 고통과 공포와 인내가 좋은 시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 극한의 상황에서 시를 놓아 버릴 수 있습니다. 삶의 곤궁은 심리적으로 사람을 어떠한 방향으로 밀어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펜을 놓지 않은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내라며 어제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 시(詩)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시를 썼던 한용운, 윤동주 등의 시인이 그러했고,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대항하며 시를 썼던 김수영, 신동엽 등의 시인이 그러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저 시인들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힘겨운 오늘을 이겨낼 수 있는 까닭, 시인들의 마음이 시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시(詩)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그리고 이겨내라고요. 희망이 가득 찬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박완호 시인은...
1965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내 안의 흔들림>, <아내의 문신> 등이 있으며, 김춘수 시문학상, 시와시학 팔로우시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서쪽>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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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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