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소상공인 코로나19 방역지원금 지급 등이 담긴 22년도 제1회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한 수정안이 가결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공동체라는 연대의식이 퇴색되고 '각자도생'으로 상징되는 개인주의가 당연시되는 요즘, 자영업자들에게만 강요된 희생은 반발을 불러왔다. 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칭찬한 'K-방역'이 국민 개개인의 방역지침 준수를 넘어 의료진과 소상공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그 '희생'에 대한 유무형의 보상에는 차별이 있었다.
유형은 당연히 금전적 보상이다. 무형은 그 희생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로 고생한 의료진들에게 '덕분에'라는 표어로 존중을 보냈다. 그런데 '자영업자'로 표현되는 소상공인들에게는 어떠했던가? 금전적 보상은 옹색했고 무형의 보상, 즉 '존중'은 감히 바랄 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정서가 주를 이뤘다.
실제 주변에 자영업자가 아닌 직장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자영업자 피해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자영업자의 당연한 의무(?)로 여기기도 했다. 이러니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같은 소위 '기술 관료'의 의식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 가능했다.
물론 일부분은 이해한다. 필자 또한 감히 국가 살림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회사와 자영업 현장에서 '경영'이란 것을 수십 년 동안 배우고 실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계산기의 결과에 따라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고 그 결과 누군가로부터 원망을 듣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유럽, 하다못해 일본이 왜 그렇게 자영업자에게 후한 지원을 했을까? 그들도 이런 재정적 지원에 내재된 부작용과 위험을 모를 리 없다. 그러함에도 이런 과감한 정책을 시행한 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국가의 '재정상태'보다 '연대의식'이 더 중요한 가치란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장 IMF를 돌이켜 보자, 당시 국가를 부도 사태에 빠트렸던 것은 관료들이었고 나라를 부도에서 구한 것은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국민의 연대의식이었다.
간과된 필수 요소, 공정 그리고 연대의식
네덜란드의 동물학자 '프란스 드발'이 네이처에 기고한 '원숭이들이 불평등한 보수를 거부하다'라는 논문이 이를 방증한다. 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카푸친이란 종류의 원숭이 두 마리에게 똑같은 과제를 수행하게 한 후, 포도와 오이로 차별된 보상을 했더니 (서로 어떤 보상을 받는지 볼 수 있게 했다) 오이를 받은 녀석이 사람에게 오이를 집어 던지며 화를 내더라는 실험이었다.
해당 논문은 오이가 맛이 없다 한들, 던져 버리느니 먹는 것이 분명 이익임에도 원숭이가 오이를 던진 것은,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에겐 진화의 과정에서 경제적 이익보다 '공정성'이 본능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즉, 공정성은 개인과 사회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장착된 도덕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관료들이 이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이다. 숫자만 보느라 가장 중요한 '공동체 속 인간'이란 요소를 간과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3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지난해 4%의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 특히 수출은 최고의 실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즉 소상공인 누군가가 경제적 빈곤층으로 추락할 때 어떤 누군가는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소상공인들의 마음에는 '왜 나만?'이라는 응어리가 남을 것이다. 그에 더해 '능력주의 사회'에 각인된 '실패=무능'이란 눈초리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부정적 감정은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에 균열을 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훗날, 이 균열은 국가 재정의 위험 요소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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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어 나간 다음에 '1억 받으실 분' 이럴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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