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첫항은 유언비어 금지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초헌법적인 대통령명령으로 인신구속을 정당화한 이 조치의 첫 항은 바로 ‘유언비어 금지’였다. 출처는 대한뉴스 제1031호(75년 5월 17일) 영상화면.
대한뉴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 8일 해제될 때까지 4년 6개월 27일 정확히 1,669일간 헌법반대나 개헌에 관한 국민들의 입과 귀는 막혀졌고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봉해졌다.
긴급조치 9호 시대는 민주주의 암흑기로서 이 기간에 8백여 명의 구속자가 발생하는 등 '전국토의 감옥화' '전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긴급조치 동안 학생ㆍ교수ㆍ문인ㆍ정치인ㆍ종교인ㆍ시민 등 모두 1천 4백여 명이 이 조치로 옥고를 치렀다. 긴급조치 시대야말로 우리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인권탄압과 독재의 암흑시대라 할 것이다.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 9호는 사실상 계엄령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이런 와중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군사정권과 첨예하게 대치해왔던 장준하가 8월 17일 등산길에 암살되었다.
유신정변으로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에게 재야 반체제운동을 지도하는 장준하의 존재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무엇보다 박대통령은 장준하에 대해 도덕적으로 심한 열등감을 느끼는 관계였다. 일본에 충성을 다 바친 일본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가 광복군 대위 출신인 장준하에게 갖게 된 피할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1975년은 정치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박대통령이 대단히 불안스러운 해였다. 한해 전인 74년 8ㆍ15기념식장에서 총격으로 부인을 잃어 정서적으로 크게 안정을 잃은데다가 학생ㆍ재야인사들의 반유신 투쟁으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기도 했지만, 대대적인 국민의 분노가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