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 부영시장(공설시장) 모습
군산시
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에는 조선인이 이용하는 공설시장이 두 곳 있었다. 하나는 1931년 12월 일제가 신영정(현 신영동) 철도부지에 개장한 부영시장(공설시장)이고, 또 하나는 1936년 4월 산상정(현 선양동)에 설치한 제2시장(산상정 시장)이었다. (관련기사:
'시장 사용료'까지... 일제의 지독한 조선인 차별)
일제가 관리·운영했던 두 공설시장('부영시장'과 '제2시장')은 광복 후 극도의 혼란기(미군정기)에도 시장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부영시장은 구시장, 신영시장, 공설시장 등으로 불리면서 지역의 서민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식량과 의복을 배급받아 겨우 연명하는 배급경제 속에서도 상권이 확대되고 이용객도 해마다 증가한다.
공설시장 주변 골목은 매일 혼잡을 이뤘다. 인근 상가와 가정집에서 버리는 음식물도 한몫했다. 이곳저곳에 쓰레기가 쌓였고, 행상들이 팔다 남은 반찬꺼리까지 더해져 주민들 보건 위생에 문제가 됐던 것. 시장 앞 간선도로 역시 잡상인들이 좌판을 벌이는 바람에 행인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아래는 1947년 11월 23일 치 <군산신문> 기사 한 대목이다.
"부(府)에서는 문란(紊亂)한 점을 없애고 부민의 편리를 도모하고 물자 집산을 원활히 하여 가격균등 유지를 확립하기 위해 미원동(米原洞) 4,200여평(坪) 대지에 4천6백만 원 공비(公費)로 현재의 약 3배의 중앙공설시장(中央公設市場) 설립 계획을 세워왔으며 그 계획 준비도 완성되고 상인의 신입(申込)도 대다수에 달하였음으로 불원간 공사에 착수하리라 한다. (현대어로 수정)"
신설될 중앙공설시장은 점포 5백 개, 노점상 2천 명 수용 규모이고 공사비는 국고와 부(府) 예산으로 지출하되 부족분은 신입자 부담으로 추진, 1948년 5월 준공하게 될 거라고 신문은 전한다. 이어 '신시장에 의한 부민의 편리와 이익은 막대할 것이며, 현재 시장(부영시장)은 질서문란과 비위생적인 점을 면치 못함으로 불원간 철폐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신축건물 규모와 준공 시기, 입주 상인들의 입주금 납부 등 공사 내역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 미원동에 대규모 공설시장이 들어섰다는 보도는 어느 매체나 구전(口傳)을 통해서도 접할 수 없었다. 불원간 철폐될 거라는 부영시장 역시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신영동에 자리한 마트형 '공설시장'이 그것이다.
50~60년대 신영동 '공설시장' 모습
군산 공설시장은 한국전쟁(1950~1953)을 거치면서 목조건물 일부가 파괴 및 소실된다. 이후 노천시장 또는 천막 시장으로 유지하다가 1962년 개축된다. 그렇게 큰 재해를 당하면서도 지역의 서민경제 중심지로 부상한다. 충남 일부(강경, 논산, 부여, 서천, 장항)와 전북 서부권(만경, 김제, 부안) 주민도 이용하는 등 시장권도 확대된다.
아궁이에 무쇠 가마솥 걸어놓고 밥해 먹던 50~60년대, 당시 공설시장은 정미기를 갖춘 대형 방앗간 두 곳을 비롯해 싸전거리, 닭 전(가축시장), 감독(감도가), 양키시장 등과 벨트를 이루고 있었다.
위는 군산 도립병원에서 의료봉사(1954~1956) 하던 영국인 의사 존 콘스 박사가 찍은 공설시장 모습이다. 위치는 반찬가게 골목과 마주한 채소전 입구로 보인다. 요즘은 구경조차 어려운 각종 사기그릇과 골판지를 덧댄 판잣집 상가들이 시대를 반영한다. 미국의 원조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아낙들의 말쑥한 옷차림에서 여유와 활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채소전은 지붕 없는 노천시장으로 시골 아낙들이 머리와 어깨에 이고 지고 내온 무, 배추, 봄똥배추(봄동배추), 콩밭지꺼리(콩밭에 심은 열무), 남새 등을 벌여놓고 팔았다. 하우스 재배가 없던 그때는 장에 나오는 채소 종류도 계절에 따라 달랐으며, 사람들은 나무새만 보고도 날짜와 절기 변화를 가늠하였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목을 움츠러들게 하는 겨울의 채소전은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소한, 대한 지나고 날이 풀리면 봄똥배추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서 생기가 돌았다. 시골 할머니들이 캐오는 쑥과 냉이, 달래향이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려줬던 것. 콩밭지꺼리는 여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