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 광산 일대 현재는 정비된 상태이며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박기철
부슬비가 내리던 지난해 가을, 경산 코발트 광산을 찾았었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아무도 없는 곳을 혼자서 둘러보고 있을 때 한 가족이 차에서 내렸다. 할아버지와 아들 내외 그리고 두 명의 손녀들이었다. 마침 추석 연휴라 그런지 이곳에 참배하러 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광산 입구를 지나 위령탑 쪽으로 다가갔다. 도중에 아버지는 이곳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안내판 앞에서 딸들에게 뭔가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윽고 위령탑 앞에 도착한 가족들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 참배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멀찍이서 기다리다가 참배가 끝나자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서 당신의 아버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빗줄기가 굵어져 더이상 대화를 할 수 없어 사진 사용에 대한 허락만 받고 돌아섰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일군 광산
경산 코발트 광산은 '춘길광산'이라는 이름으로 1937년 6월 26일에 광업허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금과 은을 캐는 광산이었지만 1942년 코발트 광맥이 발견되었고 이후 제련 시설들까지 갖추며 대규모 코발트 광산으로 탈바꿈한다.
노동자의 대부분은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었다. 당시 징용 조선인들이 있던 곳이 대부분 그랬듯이 이곳도 매우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인명사고가 빈발했다. 이때 사망한 노동자들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고 현재도 100여기의 무연고 묘가 존재한다.
이렇게 운영되던 광산은 1942년에만 6042톤 코발트를 생산하며, 당시 조선에 있던 15개의 코발트 광산을 대표하는 곳이 됐다. 여기서 생산된 코발트는 대부분 태평양 전쟁의 군수물자 생산에 사용되었고, 1944년 폐광된 이후에는 기억에서 사라지며 방치되었다.
1950년, 코발트 광산에서 발생한 사건
한국 전쟁 직전, 전국의 형무소는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을 겪으면서 정부는 국가보안법 등을 근거로 좌익세력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러다 보니 전국의 형무소는 정원을 훨씬 초과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구 형무소가 심각했는데 8명 정원인 방에 24명이 수감되기도 했다. 당시 대구 형무소는 1500명 정원이었지만 실제 수감된 인원은 3068명이었다. 강당, 창고, 작업장 등 모든 공간이 감방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는데, 대구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1950년 7월 대구 형무소 재소자 중 1402명 신병이 군경에게 인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경에게 인도된 재소자들은 대부분 대구 근교에서 집단 총살된 것으로 추정하였다(1960년 6월 7일자 보도).
이 재소자들 중 상당한 인원이 바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당시 지역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7월 20일 경부터 트럭이 매일 광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트럭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쉼없이 올라갔는데 그때마다 광산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이런 일이 무려 9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군경에게 학살당한 이들은 재소자들 뿐 아니라, 대구, 경산, 청도 등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이들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했고 군경은 그들을 코발트 광산으로 끌고 와 살해했다. 희생자 중에는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때 희생된 민간인을 1800여명 이상으로 추정했고, 유족 단체는 3500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약 5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 중 127명에 대해서만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적 희생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다. 많은 유해가 신원 증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