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00명당 백신 투여 횟수를 나타낸 지도. 한 사람이 여러 회 접종을 한 경우 각각의 횟수가 개별적으로 집계되었으므로 100명당 투여 횟수가 100 이상일 수 있다.
Our World in Data
초유의 팬데믹 상황을 맞아 백신의 개발과 생산, 공평한 접근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 정상들은 지난 2020년 세계 백신 공동 분배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를 출범시켰다.
그렇지만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각기 자국 국민을 위한 백신 사재기에 돌입하다 보니 백신 구매를 위해 약속한 기금 마련이 지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신 물량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백신을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s)'라 부르며 같이 구매해 나눠 쓰자는 초기 취지는 사라지고, 쓰고 남은 백신을 나눠 주는 방식의 백신 원조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패의 원인에는 뿌리 깊은 불평등 위에 세워진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한계, 그리고 위기를 이용해 이윤을 창출하는 '재난 자본주의 (disaster capitalism)'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원조 및 개발 관련 이슈로만 한정해 보아도 ODA 자금 덕분에 개발된 백신을 ODA의 취지와 무색하게 사기업의 이윤 추구 모델에 맡겨도 되는 것인지 , 백신 외교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잔여 백신 기부를 ODA 기금으로 환산해도 괜찮은 것인지 같은 윤리적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재난 위기서 이윤 만들어내는 재난 자본주의
현재의 백신 원조는 개발원조의 정치화와 자국 이익 추구 경향 강화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는 새삼 새로운 건 아니다. 원래 개발원조는 단지 국제사회에 대한 연대의식이나 책무성만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가 이와 같은 원조의 자국주의화를 가속화하고 노골적으로 천명하게끔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서 설명했듯, 필자는 이를 감정 사회학에 비추어 이해해보려 했다. 울리히 벡(Ulrich Beck, 독일 사회학자)은 일찍이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는 안전의 가치가 최우선이 되고 타자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높아지고,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찾기 쉽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반중국, 나아가 반이민자, 반외국인 정서가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UN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헤스(António Guterres)가 "우리는 이를 함께 겪고 있고 함께 극복할 것이다 (We are in this together. We will come through this together)"라고 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 '우리' 의 의미는 배타적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타자화'가 진행되었는데,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기만 한 저소득 국가 사람들의 타자화는 말할 것도 없다. 백신은 일반 공공재와 달리 공급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배분의 경합성 문제가 생겨 더욱 그렇다. 코백스를 통한 백신 조달 시스템을 지지하던 한국 정부도 결국 백신 구매와 백신 원조라는 이중 트랙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기존 공여국 다수가 ODA예산을 삭감한 가운데, 한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2022년에 ODA 규모를 약 12.3% 확대하고 그 중에서도 보건 분야와 인도적 지원 분야에 지원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2021년도에 나온 제3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에서 보듯 개발원조의 목표를 대놓고 '국익 실현'이라고 제시하며 원조를 수단화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을 통해 높아진 국제적 위상과 자부심이, 그나마 국제적 책무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기만을 기대해 본다.
한편, 앞서 이야기한 울리히 벡은 위기가 '세계시민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세계시민주의'는 종종 자국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 논의되곤 하지만 사실 단일한 정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대신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는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정의 같은 공통의 가치이다.
그런 세계시민주의를 구성하는 기저 감정으로는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는 마음(empathy)과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마음(compassion)을 들 수 있다. 전자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인권이나 정의 같은 규범적 가치에 대한 헌신을 높인다. 후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더구나 마사 누스바움(미국 철학자)은 이들 감정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희망적이지 않은가? 세계시민'화'라는 변화형 명사가 보여주듯, 이는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