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충북도시사를 지낸 친일파 거두 박중양. 창씨명은 호추시게요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렸다.
충북인뉴스
그의 악행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충북도지사 재임 시절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를 속리산 법주사에 데려와 젊은 비구니 6명에게 술 시중을 들게 했다.
박중양은 이때 20살의 비구니 양순재를 겁탈했다. 천하의 몸쓸 짓을 당한 비구니 양순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뼛속까지 친일파로 불린 박중양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제목에 색마지사(色魔志士)란 단어를 붙였다.
일본 유학시절 물에 빠진 이토 히로부미의 처를 살려내 그의 눈에 들었다. 해방 이후에도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이토공(公)'이라 존대했다.
명성황후와 함께 일인 낭인에 살해당한 충청 병마절도사 홍재희
'얼 빠진 애국옹'은 대한제국 진남영의 특무정교 출신의 군인이다. 진남영은 충의공 홍재희에 의해 설립된다.
1887년 당시 충청 병마절도사 홍재희(洪在熹)는 병영의 청사를 창건하고 병사를 모집해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듬해인 1888년 진남영(鎭南營)의 영호가 하사된다.
이원하가 진남영 소속이었던 만큼 홍재희는 그의 직속상관인 셈이다.
홍재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 전쟁 당시 왕실의 초토사가 돼 농민군을 진압하는 책임을 졌다.
이때 청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여 일제가 조선침략을 첫발을 내딛게 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홍재희의 삶은 명성황후와 함께 빛을 보고 그와 함께 생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홍재희는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무예청(武藝廳) 이라는 왕실 호위대 소속 일개 '무사(武士)'였다.
그에게 출세의 기회가 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죽인 뒤 명성황후를 죽이려 했다.
이때 궁녀로 변장한 무예별감 홍재희는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피신시켜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후 충청병마절도사, 황실 호위부대인 장위영의 영관,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는 양호초토사로 승승장구했다. 홍재희는 나중에 이름을 홍계훈으로 개명했다.
1895년 8월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는 낭인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한다. 이때 홍재희도 일본 낭인들에 맞서 싸우다 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자신의 직속상관비를 모충사로 불러들여 능욕한 모충회의 이원하
추모비 앞에서 궁성요배, 친일거두 불러들여 군인 정신 추모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이 작성한 논문 '대한제국의 장충사업과 그 이념'에 따르면 청주시 모충동에 있는 모충사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8월에 세워졌다.
처음 세워진 장소는 모충동이 아니라 지금의 충북도청 뒤에 있는 당산 북쪽이었다.
모충사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목숨을 잃은 관군 73명의 위페를 모신 사당으로 지어졌다.
모충회의 전신인 모충계가 주도했는데 모충계는 홍재희가 설립한 진남영 소속 군인들과 희생당한 관군의 유족들이 참여했다.
그렇게 유지되던 모충사는 일제에 의해 철거된다. 1923년 박중양이 지사로 있던 충북도와 일인들은 모충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일제 신사(神社)를 건립한다.
그러자 모충회는 지금 서원대학교가 들어서 있는 청주군 사주면 화흥리(현 청주시 모충동)으로 모충사를 이전했다.
이들은 모충사를 이전하면서 땅에 파묻혔던 박재희의 '영세불망비'를 이곳으로 옮겨온다.
이런 사실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