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안경엽 회장이 교룡산성 입구에 세워진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팻말을 가리키고 있다.
오문수
성안에는 마면 7개소, 샘 99개소, 치첩 1,016개소가 있었고 군창과 무기고가 있었다.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으며 현재 동문인 홍예문과 동서간 남벽이 남아있다. 성내에는 별장청, 장대, 곡성창, 구례창, 염고, 장고, 군기, 산창, 선국사 등이 있었고 정유재란 때 이곳에 곡식과 무기, 소금, 장을 보관하고 많은 승병이 있었다.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호국사찰인 선국사에는 4점의 문화재가 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 때(1380년)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에 기여했으나 조선조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1597년) 때 명나라 장수 양원이 교룡산성을 포기하고 남원성만 고집하여 조·명 연합군이 참담하게 패배해 1만여 명이 희생됐다.
동학농민혁명(1894년) 때는 전라좌도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다. 교룡산성에 근거지를 둔 김개남 장군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수축하여 무장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9월 재봉기와운봉 민보군과의 싸움이었던 방아치 전투의 근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