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악보스타인웨이로 연속된 화음을 연주하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같은 아련하고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울려 나오는 것 아닌가.
임승수
독일 함부르크에서 물 건너온 스타인웨이로 연속된 화음을 연주하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같은 아련하고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울려 나오는 것 아닌가. 듣고 있던 아내도 피아노 소리가 무슨 종소리 같다면서 결국 이 모든 게 장비빨이냐고 한숨을 내쉰다.
아마도 덕후 기질이 다분한 내가 스타인웨이 구입을 진지하게 고민할까봐 내쉰 우려의 한숨인 듯싶다. 예술의전당 연주회에 가면 어김없이 놓여있는 피아노이고 대부분의 전문 연주자가 이 모델로 연주하지만, 타인의 연주를 듣는 것과 내 손가락을 직접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먹방 시청과 직접 섭취만큼이나 달랐다.
일분일초가 죄다 돈이다 보니 마치 노래방에 온 것처럼 끊임없이 시간을 체크했다. 아내가 자기도 연주해보자며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을 뚱땅거리는데, 소리는 귀에 안 들어오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초침만 신경 쓰인다.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는 남편 모습을 영상으로 찍느라 팔에 근육 생길 정도로 고생한 아내인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못났구나 싶다.
어느덧 예약한 시간이 다 되었지만, 노래방에도 서비스 시간이 있는데 오후 3시 30분 됐다고 바로 쫓아내겠냐 싶어 멈추지 않았다. 공연장 관계자도 그런 나의 절실한 마음을 감지했는지 밖에서 대기만 하고 있었다. 이번이 생애 마지막 대관이라면 강제퇴거 직전까지 안면몰수하고 연주했겠지만, 왠지 1~2년에 한 번씩은 연습대관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적절한 타이밍에 연주를 멈추고 공연장 관계자에게 사전 포석의 의미가 깔린 공손한 인사를 전했다.
갖고 싶은 마음, 상상으로 달래본다
그렇게 스타인웨이 소리에 만취한 상태로 휘청휘청 모차르트홀을 나섰는데, 기념사진 촬영하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음을 집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도대체 이 무슨 정신머리인지. 다행히 모차르트홀 측의 배려로 며칠 후인 12월 26일 오후 2시에 재방문해 스타인웨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두 시간, 짧다면 짧다. 하지만 여행의 본령이 감각기관을 통해 새로운 자극을 수용하고 경험하는 것이라면, 모차르트홀의 스타인웨이 체험은 명승지의 절경 정도는 훌쩍 뛰어넘는 감흥을 남긴 여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나 혼자만 이러는 거라면 수긍하겠다만, 그날 동석해 스타인웨이를 직접 연주했던 지인은 그 후 학원에서 피아노를 칠 때마다 소리가 비교되어 의욕이 떨어지고 슬럼프가 왔단다. 스마트폰의 조악한 녹음 기능 탓에 그 황홀한 음향의 1%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지만, 궁금한 분들을 위해 아내가 고생하며 촬영한 영상을 공유한다.
☞ 동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x1X3xuHDl50
프로 피아니스트와 비교하면 실수투성이에 보잘것없는 연주지만,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 열심히 연주한 만큼 미련도 후회도 없다. 마냥 흐뭇한 마음으로 수십 번 반복 청취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인적이 드문 시골로 내려가면 '스타인웨이 D-274+땅값+건축비' 충당이 가능하지 않을까?
274센티미터에 달하는 스타인웨이를 놓아야 하니 거실은 크고 여타 생활공간은 미니멀하게 설계해 건축비를 최소화하자. 아이들은 대자연을 벗 삼고 스타인웨이 소리를 들으며 크는 거지. 정서 함양에 그만이네. 아내에게 슬쩍 운을 떼 봤더니 이혼하고 혼자 가란다.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보자. 스타인웨이를 꼭 우리 집 거실에 둬야만 할까? 설사 로또에 당첨되어 구입하더라도 현재 거주하는 30평대 아파트에는 274센티미터짜리 대물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내 소유의 스타인웨이가 있지만 공간 문제로 모차르트홀에 맡겨놨다고 생각(착각)하면 어떨까?
연습대관 비용을 창고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직도 12월 21일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것 같다고? 냅두쇼, 그냥 이러고 살게. 그 누구도 내 상상력에 비용을 청구할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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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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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도 쳤다지... 스타인웨이 체험 후 나타난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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