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1921년 3월 1일 기사북로군정서의 청산리전투 소식을 전하면서 3.1절(3.1혁명)의 산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독립기념관
그가 투옥 중일 때 어느날 <기독신보> 기자가 박동완의 집을 찾았다. 방문기의 일부다.
기자는 어느 친구의 인도를 의뢰하야 체부동 121번지를 찾아가서 여섯 간 초가 움막살이 북향 대문 앞에 다다르니 박동완(朴東完)이라 2호 글자로 넓이는 한치 남짓, 길이는 세치 남짓한 얇은 송판쪽에 다가 섰거랐다.
동행한 친구는 문간에 썩 들어서며 "이리 오너라" 한마디 불렀다. 안에서 힘없는 가는 목소리로 누구 오셨나 보다 나가 보아라 하더니 일곱 살쯤 되는 남자 아이가 나오는데 그 아이는 박동완의 2남이다.
그 아이는 나와서 우리를 보더니 반기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기자는 그 아이를 대하여 너의 어머님께 기독신보사에서 누가 오셨다고 여쭈어라 하니, 그 말이 그치자마자 한숨섞인 목소리로 들어오십소서 여쭈어라 하였다. 들어서서 안마당 끝 건너방 뜰아래에 들어서니 안마루 끝에 근심섞인 파리한 얼굴로 젖먹이 자는 어린 아기를 가로안고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오셨으니 고맙습니다, 하면서 우리를 영접하시는 여자는 박동완의 부인이다. 기자는 모자를 벗어 들면서 이사하시기에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아이들은 다 충실하오이까, 부인 "우리야 무슨 괴로움이 있으리까 여러분의 근념으로" 하면서 한숨이 묻어 나오더라.
집안을 둘러보니 요사이에 집에 쫓기어서 엉터리없는 것을 천신만고하여 그 집을 주선하야 이사한 지가 몇 날이 되지 못한지라, 많지 아니한 세간 부평등속일 망정 아직 제자리에 놓지 못한 터이라, 여기저기 어수선한 것은 둘째이고 부엌을 들여다보니 나무 한 줄가리 없는 것을 본즉 솥에 들어갈 것도 없을 것이다… (주석 3)
박동완 가족의 궁핍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가장이 투옥되고 얼마 후 부인은 이제껏 살았던 경성부 누하동 214번지에서 종로구 체부동 121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생활비를 줄이고자 더 작은 집으로 옮긴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7살 쯤 되는 남자 아이는 박동완의 차남 박창희였다. 실제 나이는 10살이었는데 영양실조로 왜소하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의 증언이다.
아버지가 감옥에 계시는 동안 우리 식구는 밥 굶기를 밥먹듯이 하였지. 며칠을 굶었는지 몰라. 막내가 영 기력이 없는거야. 그걸 보던 어머니가 끼니를 구하러 나가셨어. 그래 온 가족이 대문 밖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외출했다 돌아온 어머니 손에는 어디선가 구해 오신 좁살 한 되가 들려있었어.
어머니께서는 그걸로 우리에게 좁쌀죽을 끓여주셨지. 덕분에 그 날 저녁은 온 가족이 모처럼 끼니를 거르지 않았어. 그때 먹었던 좁쌀죽이 정말 맛있었지… 그러니까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주석 4)
주석
1> <동아일보>, 1920년 9월 24일.
2>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55~56쪽.
3> <기독신보>, 1920년 9월 25일.
4> 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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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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