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맞춤법 제52항은 "한자어에서 본음으로도 나고 속음으로도 나는 것은 각각 그 소리에 따라 적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장호철
국문법에선 '활음조 현상'
한글맞춤법 제52항에서 규정한 표기를, 국문법에선 '활음조(滑音調) 현상'으로 설명한다. "미끄러질 활(滑), 소리 음(音), 고를 조(調)"로 쓰는 활음조 현상은 발음하기가 어렵고 듣기 거슬리는 소리에 어떤 소리를 더하거나 바꾸어 발음하기가 쉽고 듣기 부드러운 소리로 되게 하는 음운 현상이다.
활음조 현상은 음조를 부드럽게 하려고 'ㄴ'음을 'ㄹ'로 바꾸거나, 발음을 쉽게 하려고 'ㄹ'음을 'ㄴ' 따위로 바꾼다. 유음인 'ㄹ'은 울림소리여서 발음하기가 'ㄴ'보다 수월하다. 그러나 'ㄹ'보다 'ㄴ'이 발음하기 쉬울 때는 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또 모음에 'ㄹ'이 덧나는 예도 있다.
① 본음 'ㄴ'을 'ㄹ'로 바꾸는 것([ ]속은 발음)
困難(곤난)-곤란[놀란] / 論難(논난)-논란[놀란] / 大怒(대노)-대로 / 무녕왕(武寧王)-무령왕
漢拏山(한나산)-한라산[할라산] / 寒暖(한난)-한란[할란] / 許諾(허낙)-허락 / 喜怒(희노)-희로
② 본음 'ㄹ'을 'ㄴ'으로 바꾸는 것
議論(의론)-의논 / 過濫(과람)-과남
③ 모음에 'ㄹ'을 덧붙이는 것
智異山(지이산)-지리산 / 권연(捲煙) → 궐련 / 폐염(肺炎) → 폐렴
④ 자음 'ㄱ'과 'ㅂ'을 떨어뜨리는 것
십왕(十王)-시왕 / 육월(六月)-유월 / 십월(十月)-시월
이쯤 되면 '정말 한글 어렵다'라는 푸념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법이란 일상생활에서 언중(言衆)이 사용해서 굳어진 것을 표준으로 잡아서 규정한 것이므로 어떤 문자든 예외가 없을 수 없다. 여기서 언중의 선택은 '언어 경제', 즉 발음하는 데 들이는 노력을 줄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쉽게 발음하고자 하여 일어나는, '예외'의 현상
'곤난'을 그대로 발음하면 힘드니 '곤란'으로, '지이산'보다 '지리산'이 편하므로 그리 쓰는 것이다. '보녕(保寧)'이나 '의녕(宜寧)' 같은 지명도 '이어녕(李御寧)' 같은 인명도 '보령', '의령', '이어령' 등으로 쓰는 이유도 같다. '육월(六月)'을 '유월'로 '십월(十月)'을 '시월'로 쓰기 시작한 것은 언중이고, 국어학에선 이를 활음조 현상으로 설명하고 한글맞춤법에서는 이를 '속음' 쓰기로 규정해 놓은 것이다.
모두 다 쓸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해 두면 편하겠지만, 어문규범이 발음이나 맞춤법을 모두 포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동의 언어 규범을 위한 표준화는 궁극적으로 같은 언어 사용자들이 통일된 규칙을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의 편리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