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장재동 시장(1920년대로 추정)
군산역사관
일제가 홍보용으로 만든 엽서 사진이다. '군산명소(群山名所) 선인시장(鮮人市場)'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1915년 2월 장재동시장(장재시장)을 개설, 부(府)에서 경영하다가 1918년 '군산시장'이라 개칭하고 개시일(1일, 5일)을 변경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대명동 일대에 있었던 '장재시장'으로 보인다. 1923년 제작된 '군산시가도'에도 시장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소화통(중앙로 2가) 개설 전 모습으로 사진 찍은 위치는 지금의 대명동(양키시장 입구)으로 추정된다. 낮은 구릉이 좌우로 뻗어 있는데, 왼쪽 상단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이다. 중앙초등학교는 길게 뻗어 내려온 월명산 줄기를 깎아내고 그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고 운동장과 정원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 시장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장(3일장, 5일장 등)'과 도시의 일정 지역을 점유하여 연중 상행위가 이뤄지는 '상설시장'으로 나뉜다. 장재시장은 상설 시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군산부사>와 중추원(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자료에는 조선인용 농산물, 직물, 일용잡화 등이 거래되는 '정기시장'으로 나온다.
흰옷 차림 일색의 장꾼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이 장터분위기를 돋운다. 그곳에는 장꾼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주막과 일용잡화를 파는 붙박이 가게, 대장간 등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쳐놓은 차양과 장에 내다 팔 물건을 지고 왔을 지게도 여러 개 놓여있다. 방립을 쓴 촌로가 무쇠솥단지를 놓고 흥정을 벌이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장터는 민족의 애환이 담긴 공간으로 삶의 터전이었다. 장날은 필요한 물품 거래와 함께 이웃 마을 주민들과 만남이 이뤄지는 날이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막걸리 한 사발 기울이며 어수선한 시국 이야기에 곁들여 집안 소식을 주고받았던 것. 또한 장터는 지방 고유의 특산물은 물론 떡장수, 엿장수, 각설이 등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일제는 장재시장 개설 이후 서래장터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군산영명학교 학생들이 1919년 3·1만세운동을 서래장터 장날에 맞춰 계획하였고, 1930년대 소설 <탁류>에서 '정주사가 안스래(경포)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준다'는 대목 등으로 미뤄 많은 조선 사람이 여전히 서래장터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 주변 동네, 해마다 물난리 겪어
군산은 1920년대 들어 도시가 확장되고 인구도 대폭 증가한다. '쌀의 군산' 소리가 회자될 정도로 미곡 생산량도 급증한다. 정미소들도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개복동, 구복동, 대정동, 장재동 등 조선인 동네 주민들 불편은 더욱 커졌다. 도로와 하수구, 오예물(汚穢物) 처리 등이 당면 문제로 떠올랐던 것. 그러나 일제 당국은 '눈감고 아웅' 식으로 대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