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때문에 뭐든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저는 사는 게 참 피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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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장을 보고 마트에서 돌아온 저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늘 하던 대로) 재빠른 손놀림으로 상의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마트에서 사용했던 체크카드가 제자리에 잘 들어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체크카드 확인 작업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언제나 2단계 과정을 거칩니다. 첫 번째 시각으로 확인하기입니다. ① 두 눈을 부릅뜨고 지갑 안쪽을 날카롭게 쏘아본다. → ② 체크카드 윗부분이 시야에 포착되면 OK.
두 번째 촉각으로 확인하기입니다. ①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반듯하게 편다. → ② 반듯하게 편 손가락 끝으로 지갑 안쪽을 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쭉쭉 세 번을 훑어 내린다. → ③ 손가락 끝에 무언가 얇고도 단단한 것이 걸리는 느낌이 들면 OK.
그날도 역시나 연달아 두 번의 OK 사인이 났고, 그러자 저는 (늘 하던 대로) 고개를 세 번 끄덕이고는 체크카드가 제자리에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체크카드 확인 작업을 끝낸 저는 "이제 마지막 고비로군"이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바짝 긴장된 손길로 아까 마트에서 사온 고구마 상자의 포장용지를 뜯었습니다.
상자에 든 고구마를 하나씩 꺼내면서 저는 하나라도 상한 게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그럴 경우 "이런 젠장, 하고 많은 것 중에 아주 형편없는 걸 골랐군. 이러니 내가 여태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생각해 봐. 고구마 상자 하나도 제대로 못 고르는 바보가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라며 심장이 상하도록 모질게 제 자신을 학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날은 고구마 상태가 다 양호했고, 그래서 그날은 모진 자기 학대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불안 때문에 뭐든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저는 사는 게 참 피곤합니다. 그래서 장을 보고 돌아와 고구마 검사까지 마치고 나면 저는 "산다는 게 이리도 힘든 줄 몰랐다. 이렇게 힘들게 살기 전에는" 하면서 제 자신에게 한참이나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는 컴퓨터 자판을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으로 콕콕 눌러가며 소설을 씁니다.
저는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저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제 소설의 주인공 <털 빠진 푸들>은 심한 불안에 시달립니다. 얼마나 불안이 심한지 그는 스트레스로 온몸의 털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청년을 만나 따뜻한 위로를 받으면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고, 결국 모든 불안을 말끔히 털어 버리고 새롭게 거듭납니다.
그런 그를 보며 저는 "털 빠진 푸들아, 축하해. 불안을 이겨낸 것 축하해. 나도 언젠가 이겨낼 수 있겠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대신해 제가 이렇게 제 자신에게 대답합니다. "그렇고 말고. 넌 틀림없이 이겨낼 거야. 난 믿어."
그렇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저를 짓누르는 이 거대한 불안을 언젠가 깨끗이 털어버릴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저는 올해 소망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1. 가스 밸브 한 번에 잠그게 되기.
2. 공과금 계좌이체 손으로만 하게 되기.
3. 체크카드 잘 있는지 눈으로만 확인하게 되기.
4. 고구마 상했다고 심장이 상하도록 자기 학대 안 하게 되기.
그리고 하나 더,
5. 제발이지 좀 코로나 19 바이러스 팬데믹 완전히 끝나게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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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째 불안에 떨고 있는 50대 남자의 새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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