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민청련동지회
그러면 이 성명서는 어떻게 작성된 것일까? 이를 위해서 먼저 김근태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부터 살펴봐야 한다. 김근태는 1985년 8월 24일 체포돼 민청련 제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한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구류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허용되던 가족 면회가 이뤄지지 않는 등 이상조짐이 있었다. 결국 구류 마지막 날인 9월 4일 새벽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9월 20일까지 17일 동안 폭행,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
김근태에 대한 고문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필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기사 작성을 위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는데, 보고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근태는 마음 속으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버티는만큼 고문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김근태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고문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무참히 파괴한다는 점에서 야만적이고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이다. 만약 피해자가 고문에 굴복하면 신체에 대한 파괴는 줄일 수 있지만 정신은 파괴되고, 고문에 굴복하지 않으면 정신은 지킬 수 있으나 신체는 파괴되고 만다. 결국 고문피해자는 어떤 경우든 가혹한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김근태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동안 외부에 있는 가족과 동지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근태의 행방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이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수감된 사람은 언젠가는 조사받는 곳에서 검찰로 이관될 것이라는 한 법조인의 조언에 따라서 김근태의 배우자 인재근은 검찰청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이 적중해 9월 26일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인재근은 극적으로 김근태와 마주치게 됐다. 그리고 5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는 1분여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이때 김근태는 고문 사실을 인재근에게 알렸다. 김근태는 훗날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같은 것이었다'고 회고했었다.
김근태로부터 끔찍한 사실을 전해들은 인재근은 기독교회관으로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그래서 김근태에 대한 야만적인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당시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주변 동지들을 포함한 소수였다. 왜냐하면 군사독재 정권 시절 이와 같은 사실은 국내 언론에 제대로 보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근태 고문 사실은 국내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더 빨리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인재근의 폭로 내용은 바로 미국에 있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 전해져서 미국 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김대중도서관이 이번에 공개한 자료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유포된 것이다.
이 영문 자료의 생산 과정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국제전화로 내용을 파악한 미국의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서 직접 영문으로 작성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작성된 문서가 인편이나 우편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달됐을 가능성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사안의 시급성을 감안할 때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인재근이 밝힌 김근태 고문 사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문으로 작성된 이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