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에게는 좋은 물건을 주리라 믿고, 가격도 흥정하지 않는 내가 호구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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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가게였기에 더 실망했다. '단골의 의리'를 나만 생각한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평소에 물건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시장이라고 무조건 깎고 보거나, 상인도 깎을 것을 어림해 미리 높여 부르는 행태가 싫었다. 마트의 가격표를 에누리하지 않듯, 신뢰 속에 재래시장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상인이 덤을 줄 때, 기분 좋게 받을 뿐이었다. 단골에게는 좋은 물건을 주리라 믿고, 가격도 흥정하지 않는 내가 호구였던 걸까. 친정어머니는 네가 순해 보이니까 속여먹은 것이라고 하셨다.
고(故) 박완서 작가의 <노파>라는 콩트가 생각났다. 주인공은 추운 날 노점에서 채소를 파는 노파가 안타까운 마음에 채소를 사준다. '마음 좋은 아주머이'라고 불리는 단골이 되고 나니, 노파는 슬쩍슬쩍 썩은 걸 섞어주기 시작했고, 값도 남보다 비싸게 받았다. 어쩌다 주인공이 불평하면 '마음 좋은 아주머이'답지 않다고 핀잔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사과 없는 상인의 응대에 화가 났다. 대형마트에 불량상품을 가져가면, 안내창구에서 두말없이 환불해준다. 단골이라는 이유로 왜 감정노동을 해야 할까? 그 일 이후, 농수산물시장에 가는 일이 줄었다. 다른 가게에서 장을 보고 나올 때, 단골 가게 주인과 눈이 마주칠까 서둘러 지나가는 일도 마음의 짐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싫어진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섞지 않아도 되는 건조한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아닌가 보다. 예상 외로 주변 50대 중년 지인들이 무인 주문 기계인 키오스크(KIOSK)가 오히려 편하다고 말한다. 물론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당황하기도 한다. 중장년층이 햄버거 가게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다가 주문을 포기했다거나, 공항 키오스크에서 가족 발권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항공사 직원과 실랑이했다는 뉴스 기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나 역시 커피전문점에서 헤맨 적이 있다. 키오스크에서 아이스 카페라테를 시키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림에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냥 뜨거운 걸 마시자' 싶어 카페라테 버튼을 누르니 그제야 아이스(ice)냐 핫(hot)이냐를 묻는 화면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우유의 양도 얼음의 양도 물었다. 그때까지 긴장했던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연한 커피를 좋아해 매번 직원에게 "얼음을 조금 빼고 우유를 더 넣어주세요" 말하는데 점원이 바로 알아듣지 못할 때는 반복해서 말하기가 번거롭고, 내가 까다로운 사람이 된 듯해서 불편했기 때문이다.
"키오스크가 편하다"는 50대 지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