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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하나요'... 아파트의 화재 대피훈련은 어렵다

[소방으로 通하다] 미국 소방검사 매뉴얼

등록 2021.12.20 10:50수정 2021.12.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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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불'은 우리 생활에 축복을, 또 때로는 공포와 절망을 가져다줬다.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예전에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크고 복잡한 건축물과 마치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아 있는 빌딩 안에서 우리는 생활하고 있다.   

이런 건물들은 이용하는 측면에서 보면 아름다움, 쾌적함, 사용의 효율성과 편리함 등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화재·지진·화학사고 등 재난상황이 발생할 경우 대피·인명구조·수색을 어렵게 만들어 다수의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가져온다.

지난 글에서는 화재 대피훈련이 단순히 횟수와 절차 같은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자신이 생활하는 건물의 상황과 특성에 맞게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글에서는 화재 대피훈련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소개함으로써 현장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이 보다 더 안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코로나 이전 촬영된 사진으로 한 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화재 대피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 촬영된 사진으로 한 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화재 대피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이건

[에피소드①] 수술 중 대피하다

부대 미군 의사가 잔뜩 화가 났다. 당시 그는 누군가의 입술을 꿰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화재경보가 울리자 입술에 바늘을 꽂은 상태에서 환자와 함께 대피한 것이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상황이 아닌 대피훈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소방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대피훈련 자체가 부대 규정에 따라 실시된 것이었으므로 그의 불평은 곧바로 공허한 메아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몇 가지 생각해볼 지점은 존재한다.

화재 대피훈련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 등 특수한 상황에서의 대피훈련은 관계 부서와 사전 조율이 필수다. 실제 응급상황이 자칫 훈련으로 인해 2차 피해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따라서 실제로 대피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아니면 비상방송이 없는 한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예외를 인정할 것인지에 관해 병원 안전담당자와 논의해서 결정하면 좋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병원 수술실 사례와 마찬가지로 만일 재판 중이나 스포츠 경기 중에 화재경보가 울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한다.  


일전에 한 국제 스포츠 경기 중에 화재경보가 울렸으나 대회 관계자는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적절한 대피 안내방송도 하지 않았다. 화재경보가 오작동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 그의 판단이 운 좋게도 들어맞았지만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짐작이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에피소드②] 잠자는 조종사를 깨우다


추운 겨울, 부대 내 호텔에서 대피훈련이 진행됐다. 화재경보가 울리고 삼삼오오 건물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모두 대피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마다 체크하다 보니 훈련이 종료되기까지 제법 시간이 소요됐다.

훈련을 마치자 곧바로 소방서장의 호출이 이어진다. 훈련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조금 신속하게 훈련을 마칠 수 있도록 방법을 고안해 달라는 주문이다. 당시 호텔에는 비행을 앞두고 있는 조종사들이 체류하고 있었는데 대피훈련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비행 스케줄이 지연됐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투숙하고 있는지에 대해 소방관이 일일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대비해 훈련을 시작하기 전 호텔 담당자와 함께 특이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추가로 소방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인원 체크를 한다면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소드③] 켜져 있는 조리기구를 찾아라

유치원과 학교처럼 매월 대피훈련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자신의 업무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되기도 한다.

이런 일은 특히 주방에서 많이 발생한다. 점심시간에 맞춰 학생들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요리사들의 입장에서는 한참 요리를 하고 있는데 대피훈련을 하게 되면 매우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진다. 조리도구의 전원을 끄면 요리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온도를 최저로 낮추고 대피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화재로 인한 대피훈련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불을 켜놓고 나간다는 것은 실제 훈련의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비록 학교 학생들이 절차에 따라 잘 대피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평가는 '불합격'이 된다. 

[에피소드④] 아파트 대피훈련은 어렵다

부대 내 아파트에는 많은 수의 미군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통상 1년에 한 번 대피훈련을 진행하는데 훈련을 마치면 어김없이 많은 불만들이 쏟아져 나온다.

반려동물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서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만큼은 피해서 하면 안 되느냐, 다리를 다친 부상자도 나가야 하느냐 등 정말 다양한 질문과 요청들이 쇄도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파트 소방훈련을 할 때에는 부대 내 주택과와 먼저 협의하고 따로 사령관의 승인도 받는다. 향후 발생할 다양한 불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다.

훈련이 시작되면 다양한 지적사항이 발견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 화재경보 후 5분이 지나도 귀를 막고 방에 앉아 나오지 않는 사람, 밖으로 대피했다가 춥다며 다시 건물로 들어오는 사람까지 가지각색이다.

훈련을 마치고 불합격 평가가 나오지만 추가로 훈련 일정을 잡기는 쉽지 않다. 참가대상이 군인이 아닌 일반인이라서 규정을 강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번 훈련을 하면서도 원칙과 현장이라는 중간점을 어느 지점에서 잡아 어떻게 밸런스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결국 반상회 참석, 부녀회를 위한 특별 소방교육 등 아파트 커뮤니티와의 지속적인 소통과 참여를 통해 대피훈련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에피소드⑤] 폭발물 탄약고 장병들의 폭탄 맞은 주말 

부대 내 탄약고는 장소의 특수성과 위험도를 고려해 1년에 반드시 두 번 이상 대피훈련을 해야 한다. 대피 거리도 탄약고로부터 200미터 이상 넘는 곳까지 가야 한다. 

대피훈련을 위해서는 많은 지원인력이 필요한데 서로 시간을 맞추고 정해진 시간에 여러 건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재경보를 작동시킨 후 한 팀은 탄약고 관계자들의 대피시간을 재고 다른 팀은 차량을 이용해 건물마다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다. 이때 소방검열관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며 소방서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911로 신고가 정확히 들어왔는지도 확인한다.

지난번 훈련 결과는 참혹했다. 무려 두 곳의 건물 관계자들이 다른 업무를 하느라 화재경보를 듣지 못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불합격' 보고서가 해당 사령관에게 전달되자 탄약고에 근무하는 모든 군인들에게 주말근무라는 페널티가 주어졌다. 그야말로 장병들이 폭탄을 맞은 것이다. 일주일 후 다시 진행된 훈련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 밖에도 소개하고 싶은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결국 대피훈련은 평가보다는 유사시에 단 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도록 효과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재난상황에서 스스로 대피하기 어려운 '재난약자'를 배려한 세심한 계획과 연습은 더 중요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이건 소방칼럼니스트 #이건 소방검열관 #미국소방 #소방검사 #화재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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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Columbia Southern Univ. 산업안전보건학 석사.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소방칼럼니스트. <미국소방 연구보고서>, <이건의 재미있는 미국소방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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