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이 12월 9일 목요일 워싱턴D.C. 사우스법원 대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를 위한 화상정상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DPA
조 바이든 행정부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주창하고 있다. 과거 지미 카터 행정부는 1980년 모스크바 하계올림픽에 대한 선수단 보이콧을 주창했다. 카터 행정부는 모스크바 올림픽이 아예 무산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 보이콧은 대회 무산까지는 낳지 못했지만, 모스크바 올림픽을 '반쪽 대회'로 만드는 데엔 성공했다.
미소 냉전은 마지막 10년인 1980년대를 거쳐 1991년 크리스마스 날의 소련 해체로 막을 내렸다. 미소 냉전이 절정기를 달릴 때가 아니라 막바지 10년에 접어든 시점에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가 뒤늦게 냉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냉전에 휘말린 최대 축제
카터 행정부의 보이콧 결정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기원을 뒀다. 아프간에서는 친(親)소련 정부에 대한 이슬람 반군의 저항뿐 아니라 친소련 세력 내부의 상호 항쟁도 격렬했다. 소련은 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의 대결은 물론이고 친소련 세력 내부의 대결에도 개입했다. 이 개입은 외교적 수준을 넘어 군사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카터 행정부가 보이콧 명분으로 삼은 사건은 1979년 12월 27일 쿠데타에 대한 소련의 개입이었다. 그해 9월 16일 타라키 대통령이 아민 총리의 쿠데타로 실각하자, 타라키 정부의 부총리였던 카르말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민을 축출했다. 카르말의 쿠데타를 소련이 지원한 것이 카터 행정부의 보이콧 명분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시각을 반영하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라는 표현으로 불리게 됐다.
소련의 아프간 내전 개입이 보이콧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공산권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적이 있었다면 상황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은 그때까지 개최된 역대 올림픽 중에서 최초로 공산권에서 열린 대회다. 1980년 이전에는 냉전이 훨씬 더 첨예했으므로, 그 이전에 공산권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면 미국 진영이 어떤 형태로든 압박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보이콧을 시사한 것은 한국 시각으로 1980년 1월 5일 대국민 연설 때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소련에 대한 경제제재와 더불어, 아프간 남쪽인 파키스탄에 대한 1억5000만 달러의 군사 지원을 발표했다. 소련의 영향력이 아프간 이남으로 파급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파키스탄을 통해 소련과 아프간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 기사 '카터 대소(對蘇) 보복선언'에 따르면, 카터는 "세계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배우는 교훈 중의 하나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 침략이 전염병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자 그가 시사한 것이 올림픽 보이콧 검토다. 위 기사는 "최근 수일간 널리 토의된 대소 보복책의 하나인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 거부는 직접 요구하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침략적인 행동이 체육인들의 올림픽 참가와 관람객들의 모스크바 여행을 방해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보이콧 가능성을 시사했다"고 보도했다.
카터의 결정은 상원의 지지를 받았다. 1월 30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상원은 보이콧 결의안을 88 대 4라는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다. 이런 분위기는 영국·일본을 비롯한 미국 동맹국 진영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한국도 당연히 영향을 받았다.
정치적 격동기 한국
그런데 이 시기의 한국은 정치적 격동의 와중에 있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대항이 1979년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며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 전두환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정변들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행정을 장악한 쪽은 약체인 최규하 정부였다. 이 정부의 실세는 그해 12월 6일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4일 뒤에 총리로 지명된 신현확이었다. 국회에서 신현확 총리 임명동의안이 통과된 12월 12일에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를 위협하고 압박하기는 했지만 행정권을 곧바로 장악하진 못했다. 신군부가 행정부 내부로 본격 진입한 것은 전두환이 각료급 회의 참가 자격을 얻고자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한 1980년 4월 14일부터였다.
신현확 전 총리의 아들인 신철식 전 국무조정실 차장이 쓴 <신현확의 증언>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은 12·12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정치 개입을 알리는 확실한 신호탄이었다"고 한 뒤 "전두환 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게 된 뒤로 최규하 대통령과 신군부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며 "최 대통령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군의 지지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신호탄'이 울린 것은 4월 14일이고 전두환 신군부가 정부를 공식 장악한 것은 다음 달이었다. 5.17 쿠데타 및 5.18 학살 뒤인 5월 31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시키면서부터였다. 임시정부 혹은 비상정부 성격을 띤 이 기구의 상임위원장 직을 전두환이 차지하면서 정부 권력이 공식적으로 넘어갔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보이콧 움직임이 일던던 1980년 1월 당시에 한국을 이끄는 권력은 작게는 신군부에 둘러싸이고 크게는 민주화세력에 둘러싸인 최규하 정부였다. 신현확이라는 인물의 행정적 역량이 출중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한국 정부는 국민과 군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약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약체 정부가 미국발(發) 올림픽 보이콧이라는 격랑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최대한 버텼던 '약체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