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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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난다. 이 일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급히 떠나 피난 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안 의사 일가는 상하이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는 상하이에 남은 안 의사 가족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당장 황 여사의 아버지 황일청은 윤봉길 의거 후 평양으로 끌려가 연금생활을 한다. 황 여사의 어머니 안현생도 이때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간다. 상하이에 남은 황 여사가 할머니 김아려 여사의 손에 자랄 수밖에 없던 이유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칼날은 안중근의 하나 남은 아들 안준생에게 집중됐다.
정확히 30년을 버틴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고 만다. 1939년 10월 15일 안준생은 이토 히루보미의 아들이자 일본 광업 사장이었던 이토 분키치를 박문사(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당)에서 만나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안중근의 아들이 이토의 아들을 만나 사죄한 일은 이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박문사에서 이뤄졌다. 다음날 매일신보 등 친일신문은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이 잇다'라는 제목을 써가며 관련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안준생은 어찌 됐을까. 임정의 수장 김구는 안준생을 '호부견자'라 칭하며 "더러운 변절자는 처단해야 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실제 <백범일지>에도 해방 후 중국 경찰에 '안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1939년 10월 변절하고 상하이로 돌아온 안준생을 본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고생했다"라는 한마디를 건넨다. 일제는 이후 안준생에게 고급주택을 건네며 물질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 하지만 1945년 일제는 패망하고 안준생 역시 중국 공산당에 밀려 홍콩으로 이주한다. 안준생은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혼자 국내로 들어온다. 부산 피란지에서 폐결핵을 앓았던 안준생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에서 사망한다.
1939년 안준생을 통해 박문사 화해극을 이끌어낸 일제는 시선을 돌려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과 사위 황일청을 대상으로 삼았다. 1941년엔 안현생과 황일청도 '만선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행렬에 끼어 박문사를 찾아 이토에게 분향 배례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황 여사가 불과 17세였던 1945년 12월, 아버지 황일청은 광복군 출신 인사의 총에 맞아 절명한다. 주된 이유는 황일청이 평양에서의 압류 생활 후 장쑤성 쉬저우에 끌려가 '조선인 교민회장'으로 활동했다는 것. 반강압에 의해 끌려갔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인 교민회장'을 하며 일제가 주는 녹을 먹었다. 이곳에서 황 여사와 가족들은 해방을 맞이했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황일청은 집 아래층에 교민 자녀를 위한 '서주 한국 중학교'를 열고 조선 학병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당시 쉬저우에는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온 40여 명의 광복군도 있었다. 이들과 쉬저우에 남아있던 학병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갈등도 발생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3일 밤 10시께, 광복군과 학병 출신 인사들이 함께 있던 황 여사 아버지 방에서 '꽝' 하는 굉음이 울렸다. 황일청은 머리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남긴 친일인명사전에도, 정부가 남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혼자 남은 황은주는 어찌 살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