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사진 : 정민구 기자)
은평시민신문
우리나라 유일의 장애인 고등교육을 위한 인권 시민단체인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를 설립한 김형수 사무총장은 지난 20여 년간 장애인 고등교육권 운동에 앞장서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올 6월 은평구 구산동으로 이사를 와 은평구민이 된 김 총장은 앞으로 지역에서 일상의 변화를 끌어내는 데 역할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김형수 총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 장애인 인권운동의 '인싸'라고 들었다.
"대학 때부터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걸 좀 많이 했다. 1990년대 중반은 한창 여성운동, 페미니즘운동, 환경운동, 동성애운동 등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는 때였다. 그런 새로운 운동을 따라 기존의 장애인운동에서 보이지 않던 걸 새롭게 하니 사람들이 보기에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을 거 같다."
학교 바꾸기 위해 도서관에 휠체어 매달아
- 기존에 하지 않던 새로운 거란 뭘 의미하는 건지?
"저의 존재 자체가 새로웠다(웃음). 저는 1995년에 생긴 장애인특별전형제도에 따라 대학에 입학했다. 제가 들어갈 때 22명의 장애학생이 입학하면서 학교에 장애인 대학생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학교 좀 바꿔보자, 장애인도 같이 수업받게 해 달라며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그 때 도서관에 못 들어가니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는 뭘까 고민하다 우리도 도서관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중앙도서관에 휠체어를 매달았다. 이념적 논쟁도 아니고 우리에겐 당장 필요한 일이어서 효과적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새로운 모습이 많이 나온 듯하다."
- 게르니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들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 제목이다. 동아리 이름을 뭐로 지을까 고민하는데 후배가 지나가면서 '게르니카는 어때?'라고 말했다. 보통 장애인 운동은 사랑, 봉사 뭐 이런 거 얘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거보다 한번 들으면 안 잊어버리는 이름을 택했다."
- 게르니카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1996년 한총련 사태가 있었는데 그때 교문이 다 뜯겨져 나갔다. 우리가 학교에 경사로를 지어달라고 3년 동안 요구했는데 안 해줘서 '저 교문 다시 만드는데 1년은 걸리겠구나' 했는데 2주 만에 만들어지더라. 이건 뭐지? 하면서 많이 싸웠다.
학교에서 최초로 경사로가 만들어진 게 교수식당이었다. 장애인들은 식판 들기도 어려운데 학교에서 교수식당만 서빙을 해주는 곳이어서 여기부터 만들자고 나섰다. 그리고 우리도 휠체어 타고 기도하고 싶다고 요구해서 교회에 경사로가 생기고 도서관은 마지막에 생겼다.
학교와 가장 많이 싸웠던 부분은 학교가 시설 설치에 돈이 많이 든다가 아니라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서다. 학교가 이쁘고 으리으리한데 거기에 경사로가 생기는 게 미관을 해친다고 하니 학교의 그런 논리를 깨기 위해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우리가 불쌍해서 입학시켜준 게 아니지 않나? 우리도 당당히 입학했고 등록금 내고 다녔다. 그때 학교에서 장학금 등으로 회유를 많이 했지만, 우리는 학교 장학금 받으면 이런 활동은 자유롭게 못한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에게 장학금은 큰 거였는데 그거 받으면 입 닫아야 하니까. 그래서 다른 장애인친구한테 욕도 많이 먹었다. 우리는 장학금 대신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 치열한 고민과 활동으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벌여나가다 보면 에피소드도 많았을 거 같다.
"당시 학생운동은 통일운동, 노동운동이 주류였는데 갑자기 장애학생들이 나와서 수업받고 싶어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 하니 좀 신선했던 거 같다. 그 때 선배들에게 노동해방이 되면 장애해방이 될 거야, 통일되면 장애해방이 될 거야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것도 좋지만 당장 나는 수업을 못 들어가는데, 화장실을 못 가는데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그때 선배들이 우리가 계속 장애인 문제를 얘기하면서 계단에서 구르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기본적인 인권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자각을 많이 했던 거 같다.
그때 우리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건 동성애 운동이었다. 학교에서 동성애 문제를 두고 중앙도서관 앞에 게이형들이 텐트를 치고 농성을 벌였다. 우리도 장애인 문제로 농성하고 싶다고 찾아가니 '장애인 문제랑 동성애 문제랑 별 차이 없고 단어만 바꾸면 된다, 우리 철수하니까 그대로 사용하라'는 말하고 우리가 농성할 수 있게 도와줬다.
왜 우리 문제에 관심 갖지? 저들은 차별과 혐오를 받으면서도 다른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네, 비장애인들이 우리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는 모습을 보며 각성이 많이 됐다.
또 다른 일화는 제가 다닌 문과대학에서도 '과방을 달라, 동아리방을 달라'며 공간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 학생회장이 찾아와서 어떤 게 힘든지 물어보길래 경사로가 없다,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얘기했다. 학생회장 누나가 그다음 날부터 장애학생을 위한 경사로를 만들어 달라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갑자기 왜? 나도 굳이 저렇게까지 싸우지는 않는데 왜 그럴까 하며 충격에 빠졌다.
우리의 존재도 운동계에 충격이었고 당시 운동하는 사람들이 저희를 보고 반성을 하고 행동을 했다. 장애인 친구들도 관심을 안 갖는데 비장애인 친구들이 관심을 갖고 우리보다 더 열심히 싸우네, 왜 저럴까 하는 고민이 뭉글뭉글 시작되고 게르니카가 되고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졌다."
- 치열한 장애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뭐라고 보는지?
"1990년 중반 운동계에 장애인 운동이 뭐지? 고등교육 운동, 대학 엘리트 물을 먹은 장애인들이 어떻게 활동해야 하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중간허리 즉 젊은 세대를 공급해주고 재생산했다.
대학 내에서는 장애인특별전형 이후에 장애인 접근권 문제라던가 교권 문제를 얘기했다. 어쨌든 우리를 중심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시설들이나 장애인 이동권이나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지금은 젊은 친구들이 운동에 관심을 많이 안 가지는데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재밌는 세미나, 캠프를 하고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시대에 맞춰 새로운 걸 만들었던 게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 그때 활동했던 분들이 지금은 색깔도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다르지만 다들 장애운동계에서 활동하며 큰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게 제일 큰 보람이다."
- 굉장히 발랄한 운동을 했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다. 개량화되었다, 너희 정체가 뭐냐, 회색분자냐. 근데 대학 들어왔는데, 휠체어 탔는데, 수업도 못 들어가는데 그럼 어떻게 할 거냐 고민이 많았다."
"건강한 시민운동 위해 자본으로부터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