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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구두 사러 백화점 갔다가... 식은땀이 났다

아슬아슬한 무시와 친절의 선 앞에서... '아빠편'이지 않은 걸 후회했다

등록 2021.12.18 11:52수정 2021.12.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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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그룹 '대체왜하니?'는 초4에서 중3까지 10대 사춘기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엄마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번 회는 애 말고 '나이듦'에 대한 고민을 담습니다.[편집자말]
열한 살 딸이 시력이 좋지 않아 정기적으로 종합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난 긴 대기 시간 동안 다른 환자들을 관찰한다. 종합병원에는 노인들이 많다. 간호사들은 나이든 환자들에게 아주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천천히 설명한다.

그래도 나이든 환자들은 되묻는 빈도가 잦다. 어느 날은 한 나이든 환자가 안내데스크에서 노발대발 화를 냈다.


"자식 없이 혼자 왔다고 무시하는 거야? 왜 알아듣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어?"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둘러보니 나이 든 환자들은 대부분 자녀와 함께 있다. 이런 장면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존중 받지 못하는 나이 든 사람
 
 직원은 아빠의 되묻는 말에 아주 퉁명스레 답한다. 어떤 말에는 아예 대답도 않았다.
직원은 아빠의 되묻는 말에 아주 퉁명스레 답한다. 어떤 말에는 아예 대답도 않았다.pexels
 
우리 아빠도 몇 년 전부터 TV 음향을 아주 크게 틀어놓고 보신다. 대화와 맞지 않는 다른 말을 하시기도 한다. 보청기를 사드린다고 해도 주변에 보청기 끼고 어지럼증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싫다 하신다.

눈에 좋은 음식이나 눈을 좋게 하는 운동은 많은데 청력을 좋게 하는 음식이나 운동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검색창에 '청력에 좋은 음식', '청력에 좋은 운동'을 치니, 웬일... 정력에 좋은 음식과 운동이 좌라락 뜬다.

며칠 전, 날이 좀 쌀쌀해져 아빠 외투를 사러 함께 백화점에 갔다. 월급이 들어온 날이라 내친김에 신발도 사시라고 했다. 나는 아빠 옆에서 같이 신발을 고른다. 아빠는 내 말을 몇 번씩 확인하시고 또 자신의 의견도 몇 번씩 이야기 하신다. 직원은 아빠의 되묻는 말에 아주 퉁명스레 답한다. 어떤 말에는 아예 대답도 않았다. 


아빠 : "(255 사이즈를 신고서) 이거 260 신고 싶은데요."
나 : "이거 260 있어요?"
직원 : "260은 고객님께 안 맞으세요. 지금 발가락이 그쪽에 있잖아요. 260은 헐떡거려서 안 된다고요."
아빠 : "260 없어요?"
직원 : "아니, 260은 안 맞으신다고요. 이 신발이 크.게. 나.왔.어.요."
나 : "260 안 맞는대. 그냥 다른 거 보자."


내가 다 식은땀이 났다. 손님이 많았으면 바빠서 그랬거니 했겠지만, 그 매장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신발 매장을 나와 점심을 먹는데 아빠는 얼마 전 치과에 다녀오신 일을 말씀하셨다.


"지난주에 치과를 갔는데 치과 의사가 내 이를 보고 '아버님, 백점입니다!'라고 하더라."
"응?"
"이 사이에 낀 게 하나도 없다면서 엄지를 '척' 내밀더라고."


좋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말하는 아빠의 표정이 좋지 않다.

"칭찬 아니야?"
"아니, 요새 치실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애도 아니고. 참."


아빠는 자신을 아이처럼 대한 치과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뜨끔했다. 사실 아빠와 한 시간 정도 쇼핑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이와 쇼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아빠가 직원에게 하는 말이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내가 미리 나서서 정리했다. "아빠, 그래서 이게 마음에 드시는 거예요?" 하고서. 우리 아이가 어릴 때 어른에게 길게 이야기하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늙는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 한 장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 한 장면㈜일레븐엔터테인먼트
 
가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생각한다. 그 영화에서처럼 나이가 들수록 점점 젊어지면 어떨까. 나이 들수록 모든 사람이 원하는 외모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못 들었던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들고 병뚜껑도 한 번에 획 돌려 따고. 그럼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을 무시하는 일도 없을 텐데. 파릇파릇 새싹이 자라나 활짝 꽃을 피웠다가 이내 시드는 자연의 법칙이 서글프다.

점심을 먹고 아빠의 외투를 사러 갔다.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다 아주 친절한 직원을 만났다. 아빠와 어울리는 여러 옷을 추천해주고 아빠의 되묻는 말에도 친절하게 답해준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그에 맞는 대답을 하는 것이 대화의 기본인데도 난 흔치 않은 친절을 만난 것처럼 감격스럽다.

나이가 들어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고 어른이 아이가 된 것은 아니다. 내가 아이와 다닐 때처럼 설명을 다시 해야 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아빠를 아이 대하듯 한다. 무시와 친절의 선을 아슬아슬 넘나든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구둣가게 직원이 아빠에게 260 사이즈가 안 맞을 거라고 신발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 아빠 편을 들지 못한 게 아쉽다.

"그래도 260 보여주세요. 255는 불편하시대요" 할 걸. 나중에 이런 불친절한 사람을 또 만난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아빠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아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설득하겠다고 다짐한다.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아빠의 편에 서야지. 우리는 모두 늙는다. 그 구둣가게 직원도 나도 늙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초4에서 중3까지 10대 사춘기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엄마 시민기자들의 콘텐츠
#노년 #나이 듦 #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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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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