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되어 있는 음천마을 주민의 네발과 실버카
노일영
소평댁이 네발 클럽의 리더가 된 것은 폭주와 과감한 코너링을 즐기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평댁은 인근의 거의 모든 험한 길을 네발로 답사했을 뿐만 아니라, 길이 아니라도 좋다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고 어디든 닥치는 대로 달렸다.
그 결과 소평댁은 우리 마을과 인근의 모든 농로, 비포장도로, 비탈길, 오솔길, 스스로 만든 길 등 도로와 길에 관해서라면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네발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그런 정보들을 남김없이 공유하는 걸 즐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소평댁은 네발을 가진 사람들의 추종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비너덕 언덕빼기 밑에 쪼매 몬 가서, 할마시 허리매로 꼬부라진 소나무를 지날 짝에는 조심해야 되는 기라. 거(기)는 무신 짐승이 노상 땅을 파디비 놔가꼬, 속도가 있으믄 네발이 히떡(벌러덩) 디비지뿐다꼬(뒤집힌다고)."
네발을 운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유익하고 요긴한 정보를 항상 제공하는 소평댁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소평댁은 부상이나 상처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요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멀리서부터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소평댁의 네발이 만드는 소리였다. 오토바이의 머플러가 터져서 고장이 난 지 한참 전이었지만, 소평댁은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연기관의 폭음을 날것 그대로 듣는 것을 즐겼다. 요정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과격한 편이라고 해야겠다.
"일영아! 아이고야, 아이다. 이사장! 어데 가노?"
"거참, 소평댁 아주머니, 아니 조직국장님!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일영이도 아니고 이사장도 아니고 후보자님이라고!"
"아이고야 무시라(무서워라). 알겄네, 알겄어! 지도 첨에는 소평댁이라꼬 먼저 캐놓고, 내한테 지랄해샀네. 다시 해보께, 다시 하믄 되잖아! 그노무 후보자님, 어데를 가십니까요?"
"그냥 일영이라고 해요, 아줌마. 부산댁 언니 집에 볼일이 있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잔소리를 하는 남편을 향해서는 비죽비죽 웃었다가 소평댁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후보자님, 내가 네발이 타는 영감 할마시들 한 3명은 우리 표로 맨들었뿐 거 가튼데, 그란데 한 4표는 날리뿐 거 가타가꼬, 우짜노?"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깜짝 놀란 남편이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일영이를 지지한다 카이까네 금촌댁이가 고마 박 이장 쪽으로 붙어먹어뿐 거 아이가. 금촌댁이가 쪼로로 움직이가꼬 표 4개가 저리로 가뿐 기라. 하이튼가네 '실버 카' 타는 것들은 하늘의 이치와 땅의 법도를 모른다꼬."
'실버 카'는 수동과 전동 두 가지가 있다. 수동형은 고령자용 보행보조기구라 할 수 있는데, 어르신들이 외출할 때 이 기구를 밀면서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전동형은 배터리를 이용해서 움직이는데, 편한 좌석에 앉아 느린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금촌댁은 전동형 실버 카를 이용하는 주민이다.
소평댁은 네발과 실버 카 이용자들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평댁과 금촌댁은 울타리를 사이에 둔 이웃인데, 금촌댁의 집이 비스듬한 비탈 위쪽에 있다. 금촌댁은 오래전에 집 경계를 따라 감나무와 탱자나무를 심었다.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이게 문젯거리였다.
3표를 얻고 4표를 잃다
탱자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서 늘 소평댁 집 창문에 그늘을 만들었고, 가을만 되면 감나무들의 홍시는 소평댁의 지붕과 마당에서 수류탄처럼 펑펑 터졌다. 감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 때문에 분란이 시작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명절만 되면 고향에 내려온 소평댁의 자식들이 금촌댁의 맏아들과 담판을 벌이곤 했지만, 협상은 늘 결렬됐다. 어느 해에는 소평댁의 막내아들이 나무들을 베고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는 비용 전부를 내겠다고 말했고, 금촌댁의 맏아들도 그 제안을 수용했다.
하지만 금촌댁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합의는 깨지고 말았다. 정이 든 감나무와 탱자나무 대신 생명 없는 쇠 쪼가리 따위로 집 둘레를 감쌀 수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로 소평댁과 금촌댁은 관계가 더 악화되어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4표를 얻고 3표를 잃어도 아쉬울 판에, 3 빼기 4라니요. 도대체 이게 뭡니까, 조직국장님."
소평댁은 4륜 오토바이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남편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땅을 죽을똥살똥 한번 파디비봐라, 어데 표 3개가 그냥 툭 튀나올란가. 그라고 내 이런 말은 안 할꼬 캤는데, 부산댁이가 집 내놨다 카는 소문이 있더라꼬. 집 팔아뿌고 인자 곧 동네 떠나뿔 사람인데 비서실장인동 뭔동 그게 잘 되겠냐꼬."
남편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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