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국립박물관(Landesmuseum Zurich) 전면에 걸린 '1917 혁명: 러시아와 스위스'라고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
권신영
별 뜻 없이 난 아이에게 물었다.
"왜 스위스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기념하지? 이상하지 않니?"
"엄마, 레닌이 러시아 혁명 전에 스위스에 있었어."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레닌을 아는 것도 의외인데, 1917년 레닌의 위치를 안다고?
"뭐?"
"제정 러시아 탄압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스위스로 넘어와 활동했어."
"어디서 들었어?"
"학교에서 배웠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들어갔다. 아이 말이 맞았다. 레닌은 1917년 4월 취리히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다시 기차를 타고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귀국하기까지 약 10년간 스위스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체류했다. 유럽 역사학계가 깔끔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 지점이지만 러시아 사회의 내부 동요를 원했던 독일이 고의적으로 길을 터주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레닌뿐 아니라 레닌의 동료이자 경쟁자인 트로츠키(Leon Trotsky), 러시아 여성 사회주의자, 그리고 이들의 유럽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까지 상세히 볼 수 있었다.
1917년 혁명 전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거점이 스위스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어떤 경로로 영국에서 중등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아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을까. 제대로 된 책가방을 메고 역사라는 과목으로 수업을 들은 건 고작 2년이 넘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뭘 배우는 거니.
영국 중등 교육
영국은 초등 교육이 끝나면 5년 과정의 중등 교육(secondary education)으로 들어간다.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대략 한국의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1에 해당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중등 과정을 끝내고 A-level이라 불리는 2년 과정을 더 밟아야 한다.
초등학교의 통합 교육이 영역 넘나들기였다면 중등 과정부터는 세분화된 교과목과 시간표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이가 가져온 시간표는 1주가 아닌 2주 단위로 짜여 있었다. A주와 B주로 나누고, ABABAB로 반복된다. 학과목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영어 I과 II, 수학, 생물, 화학, 물리, 역사, 지리, 라틴어, 불어, 컴퓨터, 체육, 종교(철학), 예술과 디자인, 음악, 디자인과 기술, 글로벌 스터디(Global studies)가 있었다.
초등학교의 통합 교육에서 15과목은 급작스러운 팽창이다. 학교는 첫 1-2년은 각 학문의 특성을 소개하고 기초를 다지는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3년차로 올라갈 때 과목수는 다시 줄어든다. 학생들은 필수 과목과 선택 과목을 합쳐 9과목을 공부,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GCSE 시험을 마지막 5년차에 치른다. A-level에서는 학부 전공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이 있다는 전제하에 4과목만 선택, 난이도를 확 끌어 올려 학부 전공 기초 수준으로 배운다. 다시 한 번 시험을 치고 대학에 지원하게 된다(영국 대학은 3년이다).
중등학교 입학 후 시간표는 생겼지만, 아이는 여전히 교과서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사용하고 학생들도 볼 수 있는 책이 있는데, 너무 두껍고 전문적이라고 했다. 학교가 나누어준 과목별 폴더에 선생님들이 나눠주는 복사물을 날짜별로 차곡차곡 구멍을 내어 끼어 넣을 뿐이었다. 교과서 없는 교육에 익숙해진 터라 관심을 껐다.
1차대전에 1년 치 역사 교육 할애
"레닌이 러시아 혁명 전에 스위스에서 활동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역사 교육이 정말 궁금해졌다. 내가 생각한 중학교 역사 교육은 통사적인 방식, 다시 말하면 영국 역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기별로 배우는 것이다. 통사적 시각으로 본다면, "1910년대 레닌의 스위스 거주"는 시기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아이 머리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역사 수업을 들은 기간을 고려할 때 20세기가 아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언저리를 배우고 있어야 했고, 공간적으로도 영국과 상관없는 스위스나 러시아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영국의 역사 교육은 주제별 접근이었다. 그 해의 주제는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1차 대전 발발 배경으로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와 국제 관계를 배웠다. 전쟁의 진행 방향을 각 전투별로 세세히 배웠고, 미국의 개입 과정 및 시민 사회의 반전 운동도 다루었다. 종전 후 독일에게 과도한 배상금을 요구, 결국 대공황 이후 1930년대 독일 사회를 극단화시키는 베르사유 체제까지 다뤘다. 베르사유 체제는 2차 대전 발발 배경으로 언급된다. 1917년 레닌의 귀국과 이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1차 대전의 맥락에서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