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 28일 2천여 명의 교사들이 건국대에서 '전교조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전교조
때는 6월항쟁이 끝나고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의 거리시위가 오랫동안 위력적으로 지속되었던 그해 1987년 9월 15일, 허버트 신부님이 시무하셨던 대명신학원에서 '대구 교사대토론회'가 열렸다. 이제 6월항쟁이 시민항쟁에서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고, 다시 나같은 잠자던 교사들의 각성의 계기로 진화한 것이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이승규, 유윤중 선생에게 제안해서 함께 갔던 터였다. 그날 발제자였던 이석구 선생은 학교에서 교장-교감-주임-평교사로 이어지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관계, 지식 일변도의 주입식 암기위주의 입시경쟁교육의 현실에 대해 발표하였는데 구구절절 옳은 얘기여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간 교사로서 안이하게 살아온 내 자신의 삶이 너무 하찮아서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촌지를 받기도 했고 아이들의 지각과 성적을 구실로 이따금 체벌도 해온 내 과거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달 정도 꾸물대며 망서리고 있던 차에 동국고(지금은 대원고) 정수철 선생으로부터 모임에 한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의 전화가 왔다. 솔직히 좀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한편 호기심과 설레임도 좀 있긴 했다. 모임 장소는 대구초등학교 위 설록양복점 건물의 2층 복도 어귀에 달랑 책상 하나가 놓여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배창훈, 이경희, 정만준 선생 등 내 교사로서의 삶의 방향과 진로를 바꾼 '아름다운 교육동지'들을 처음 만났다.
나보다 먼저 깨닫고 실천해온 그들에게 미안했고 은근히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건 일종의 경외심이기도 했고 연민이기도 했고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자책감이기도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고 이제 칠십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감히 내 인생의 절반을 오롯이 전교조와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껏해야 십여 명의 동지들이었지만, 십시일반 돈을 내고 시간을 내어 <대구교사신문>을 만들고 사무실을 마련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민주교육추진 대구경북교사협의회를 만들고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하고, 교육법 개정운동과 보충수업·자율학습 폐지운동, 교련탈퇴운동, 촌지거부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교협에서 전교조로 조직을 전환하려던 1989년 4월 20일 경이었다. 출퇴근 때마다 흰 세단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듯했고 집전화로 통화를 하면 윙윙 소음이 들리기도했다. 불법사찰이었다. 어느 날 밤 12시 경 책장의 문제될 만한 책들을 골라내어 박스에 한가득 넣고 네 살, 일곱 살 두 딸아이를 안고 손잡고 인근에 사시는 장모님 댁으로 갔다. 피난가는 심정이었고 장모님과 아내는 물론 두 딸아이에게 애비로서 한없이 미안했다. 허나 훗날 아버지가 훌륭한 교사였던 것으로 그들에게 기억되고 싶었다.
그 무렵 고3 어느 교실에서 수업 중 한 학생이 "선생님은 문익환 목사 방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했다. 지금은 아마도 50대에 접어들었을 그 학생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평소 나를 따르기도 한 눈매가 초롱한 학생이었다. 교사는 수업 중 학생의 어떠한 질문에도 성실히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설사 수업과 무관한 내용이더라도 말이다.
"실정법을 위반했다면 의법처리할 수 있겠지만 신을 믿는 목사님이 공산주의자일리야 있겠느냐. 학교 앞 현수막에 '위선자 문익환에게 하느님의 천벌을!' 이라는 표현은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답변의 전부였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마도 내 답변을 들은 어느 학생이 집에 가서 얘기했을 수 있고 경찰 정보과에 포착되었을 수 있으리라.
석자 폭의 좁은 교탁이지만 교사는 교육목적 상 행한 발언에 대해 어떠한 문책도 체포도 있어선 안된다. 소위 수업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에 관하여 국가는 교사에 대해 어떠한 법적·형사적 책임을 묻거나 간섭해선 안된다. 요컨대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래야만 진정한 교육권이 성립된다, 고 생각한다. 루소도 에밀이란 저서를 통해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고, 그는 나아가 교육은 국가가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을 더하여 4권분립을 주장했다고 교직과목 시간에 배워서 알고있다. 하물며 우리교육은 식민과 분단, 군부독재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으니 더 말하면 무엇하랴.
당시는 노태우 군부정권이 여소야대 국회에서 통과된 교원노조법을 비토하고 정권차원에서 공안몰이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나중 알게된 사실이지만, 전교협에서 앞장서 노조를 건설하려는 선진교사(안기부의 표현)들에 대해 선별적으로 좌경용공의 굴레를 씌우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의 서막이었다. 그 정치적 의도는 후보 때 공약한 중간평가를 뭉개기 위해 공안정국 조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근에야 알게됐지만 전교조 대량해직으로 중간평가를 피해나갔다. 요컨대 우리는 노태우 정권의 최초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1989년 4월 30일자 한겨레 신문에 보도되었듯, "치안본부, 대구 ㅅ여고 ㅈ교사 등 전국 31명의 의식화 교사 사법처리 방침"이었다. 왜 하필 내가 치안본부(본부장 강민창)가 밝힌 전국 31명의 '좌경의식화 교사' 중 1호로 지목되었단 말인가. 내가 이 나라 빨갱이 교사 1호란 말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이건 전교조 건설을 막기 위한 의도적 공안몰이다. 나의 직관적 판단이었고, 이후 안기부 문건으로도 확인되었다.
난 단 한 권의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고, 대학원 공부하면서 되레 공산주의 비판은 서너 권이나 읽었다. 단지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인간의 벽, 창작과 비평, 인간의 역사, 철학에세이, 해방전후사의 인식 몇 권을 대충 읽어본 게 전부였다. 하기야 이런 정도의 책도 당시는 운동권 서적, 이를테면 아무런 세상 경험도 없는 검사가 얼마든지 안기부의 잣대로 좌경용공 불온서적으로 못박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새까만 어둠의 시대였다.
[다음 기사] 산업화 시대의 사회적 가치 전환을 요구한 전교조 http://omn.kr/1wb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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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해직교사
詩人·한국작가회의회원
전교조 대구교육연구소장
교육민주화동지회 부회장
저서 : 『교단으로 돌아가면』 『우리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겨울나무는 외롭다』 『더 나은 교육은 가능하다』 『교육보다 교사가 먼저다』 『삼백예순날 하냥 외롭고 순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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