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영의 첫 영화 <유랑> 기념 조형물. 왼쪽 기둥에 개봉관 단성사 이름이, 가운데에는 영화를 소개하는 스틸컷과 글이다.
장호철
1927년 3월 김유영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임화, 서광제(1901~?) 등과 함께 "구태의연한 신파극에서 탈피하고 참신한 신인을 양성한다"라는 목표로안종화(1902~1966) 등이 설립한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부에 들어간다. 뒷날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1935)에 가입하게 되는 임화와 서광제, 김유영 등 연구부원들은 조직을 장악해 사실상 협회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첫 영화 <유랑>부터 3편의 경향 영화 연출
이듬해인 1928년 갓 스무살 김유영이 자신의 첫 번째 연출작으로 임화가 주연한 경향 영화 <유랑(流浪)>을 내놓은 것은 조선영화예술협회 내부의 알력과 분쟁이 낳은 뜻밖의 결과였다. 김유영의 <유랑>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일군의 젊은이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완성된 첫 영화였다.
<유랑>은 일제 압제하에서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처지에 놓인 농민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1920년대에 상상될 법한 노동자의 계급의식 심화와 비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정치적으로 교화하는 서사로는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단성사에서 개봉한 <유랑>의 흥행은 실패했고, 평가도 기대 이하였다. '리얼'했으나, "서툴고 미숙함을 면치 못했다"는 안종화의 평가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이듬해(1929)에 두 번째 작품 <혼가(昏街)>(어둠의 거리)를 제작했다. 노동자 계급의 비극적 운명과 해방투쟁을 그린 <혼가>는 <유랑>보다 강도 높게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카프 동지들로부터도 냉정한 평가를 받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29년 9월 카프에 가입한 김유영은 같은 해 12월, 임화, 서광제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영화 운동단체인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창립했다. 이어 일본 도쿄와 교토의 촬영소를 둘러보고 온 김유영은 1930년에 그간 교제해 온 소설가 최정희와 결혼했다. 1930년 4월 산하에 영화부를 신설한 카프에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해체를 권고하자 김유영은 이에 불응해 카프를 탈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