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6일 청년연합회 등 재야 6단체 대표들이 국방부 앞에서 제14대 총선 군부대 부재자 투표 부정 관련 농성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평민당은 대선에 패배했다.
야권분열과 정부여당의 노골적인 부정ㆍ관권 선거의 결과였다. 야당 중에서도 평민당과 김대중 후보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평화민주당보>는 컴퓨터 조작, 투표함 바꿔치기 등 전국 규모의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당보를 준비했다.
그러나 계약된 인쇄소는 물론 백방으로 알아보아도 업체 모두가 인쇄를 거부했다. 안기부와 경찰이 관할 인쇄소에 압력을 넣어 인쇄를 하지 못하게 방해한 때문이다. 당보 관계자들은 원고 뭉치를 들고 전라도 광주로 내려가 천주교 계통 인쇄소에서 소량의 인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도 당국의 압력으로 인쇄가 중단되었다.
평민당은 언제까지나 선거패배에 좌절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곧 닥친 총선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보는 제9호 1면에서 김총재 특별 단독회견을 싣고 향후 진로, 총선대책과 공천ㆍ재야민주인사들의 영입문제 등을 폭넓게 보도했다. 3면은 당에서 발간한 <부정선거백서> 내용을 실었다. 노태우 후보가 최소한 400만 표를 부정 득표한 구체적 부정사례를 보도했다. 4면은 부정투개표의 현장이었던 구로구청 항쟁의 수기, 부정선거를 규탄한 서대협의 민주투쟁선언문, 김승훈ㆍ오태순 신부 등의 대선무효소송, 고대총학생회의 김대중 지지선언 등을 실었다.
1988년 2월 16일자의 제10호는 사설인 <우리의 주창>에서 "유신 이래 군사독재 세력의 일관된 구도가 있다면 김총재의 말살책동이다. 이것은 한반도의 모순을 영구화하려는 외세의 구도와도 일치한다." 면서 이 땅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만든 평민당의 역할을 재다짐, 천명했다.
당보는 총선을 앞두고 매호마다 정책제시와 이돈명ㆍ이우정ㆍ이문영 등 재야 지식인들의 평민후보 지지 기고문을 싣고 구로구청 부정 살인선거와 총선의 관권 부정을 폭로했다. 투표 전날인 4월 25일 긴급특보를 발행하여 "여의도에서 100만 인파가 평민당지지 결의대회"의 내용을 김총재의 연설사진과 함께 실었다. 언론의 편파보도로 평민당 후보들은 대단히 어려운 여건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6일 실시된 제14대 총선에서 평민당은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당보는 총선이 끝난 뒤 제호를 공모하는 사고를 실었다. 보다 많은 국민과 당원들이 참여하도록, 제호의 공모를 통해 기관지를 국민과 함께 만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제호의 일반 공모를 통해 <평민신문>이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