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한영의 아내 이화순, 이한영, 이한영의 모 이성녀, 이한영의 아들 이상설.
이상설
"상설아, 얼릉 일어나! 아부지한테 가자. 여기 있다가는 모두 절단나겠다." 이른 아침에 눈을 비비는 상설(1937년 생)이에게 어머니 이화순(1915년 생)이 말했다. 이화순이 새벽부터 서두른 것은 치안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 이한영(1916년 생)은 전날에 이미 몸을 피한 터였다.
이화순은 젖먹이 상숙(1949년 생)이만 둘러 엎고 고무신을 꿰찼다. 상설도 엄마를 따라 대문을 나섰다. 모자는 이한영이 피신한 충남 아산군(현 아산시) 음봉면 의식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이화순을 만나 마을 분위기를 전해들은 이한영은 한참 만에 결심한 듯 다문 입을 열었다. "나는 돌아가야겠소." "안 돼요!" "잘못한 게 없으니 뭔 일이야 있겠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부를 해라"
남편의 고지식함에 아내는 속이 탔다. 그래도 이한영은 막무가내였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마냥 도망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참 옥신각신한 부부는 우선 이화순과 상설이 먼저 마을로 돌아가 정황을 살핀 후 이한영에게 기별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이한영이 그새를 못 참고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결국 마을 사람 출입을 살피던 이의 밀고로 이한영은 붙잡혔고 탕정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됐다. 그곳에 밥을 가져온 아들 상설에게 이한영은 "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한영의 그 말이 유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구금된 지 며칠 후인 1950년 10월 15일 탕정면사무소 뒷산 비누고개에서 학살됐다. 이한영을 포함한 탕정면 주민 98명이 북한군 부역 혐의로 경찰과 치안대원 들의 총탄 세례를 받았다.
탕정리의 청백리, 나의 아버지 이한영
미군정청으로부터 온 포장 박스를 뜯은 탕정초등학교 교사들의 입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났다. 박스에는 씨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이 가득했다. 깡통에는 껌, 과자, 베이컨 등이 담겨 있었다. 1947년 당시 조선인들은 생전 구경 한 번 못해 본 것들이다.
선생들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떤 사람은 캔을 두 개 챙겼다. 그런데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났다. "그렇게들 다 갖고 가면 다른 사람은 무얼 갖소!" 매사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이한영 교사였다. "선생님도 하나 챙기면 돼죠. 또 누가 있다고 그래요?"라고 누군가 대꾸했다.
"소사는 안 줘요?" "소사요?" 교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사는 학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다. 선생들은 '소사는 직원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소사도 엄연히 우리 학교의 일꾼이요. 그 양반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모두 알잖소. 그러니 당연히 그에게도 씨레이션을 줘야지요." 그 어떤 교사도 이한영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탕정초등학교 소사도 씨레이션 한 박스를 받게 됐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은 "역시 이한영"이라며 칭찬했다. 이미 이한영은 탕정면의 청백리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한영은 탕정면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런데 공금 횡령 사건이 일어났다. 횡령자들은 공범을 만들기 위해 그 돈을 다른 직원들에게도 나눠줬다. 그때 문제의 돈을 받지 않은 이가 딱 두명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한영이었다. 결국 횡령 사건은 들통이 났고 직원 대다수가 파면됐지만 이한영은 무사했다.
청렴함으로 이한영은 면민 대다수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그를 질시한 이들도 있었다. 그 중 누군가가 군·경 수복 시에 이한영은 부역혐의로 죽이는 데 앞장섰다. 이한영은 인민군 주둔시기 인민학교 교장을 했는데, 그게 좋은 구실이 됐다.
이한영이 인민공화국 시절 탕정인민학교(현재 탕정초등학교) 교장을 맡은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이한영은 1947년경 주변의 권유로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탕정초등학교 내 남로당 조직이 얼마 후 발각됐고 이한영은 학교 책임자로 구속됐다. 면민들의 구명운동 덕에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한영은 파면을 면할 수 없었다. 그 일로 2년간 일을 쉰 이한영은 6.25 직전에서야 탕정초등학교 신리분교 교사로 복직됐다. 때문에 북한군 입장에서 이한영은 전향한 국민보도연맹원과는 달리, 신념을 지킨 사람이었다.
이한영이 죽은 후 얼마 후 아내 이화순도 연행됐다. 그녀는 젖먹이를 업은 채로 10월 31일 면소재지 뒷산 방공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세상으로 갔다. 이한영 집안의 비극은 계속됐다. 1950년 11월 1일 치안대가 탕정면 갈산리에 들이닥쳤고 이한영의 부친 이경호(1894년생)가 연행됐다. 이경호 역시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당시 집 나이 14살이던 이상설은 간신히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빨리 몸을 피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장롱 뒤에 숨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돼 마을 사람의 밀고로 이상설도 연행되었다. 가족이 몰살한 데 이어 장손 상설까지 연행되자, 할머니 이성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성녀는 탕정면 명암리에 살던 집안 손자 뻘인 이영배를 찾아갔다. 이영배는 전쟁 전에 온양군에서 지서장을 지냈고 여전히 경찰 신분이었다. "우리 손주 좀 살려주게" 읍소하는 이성녀에게 이영배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이상설이 잡혀있던 탕정지서를 찾아간 이영배는 지서장에게 고함을 쳤다. "당신도 자식이 있잖소. 14세 애를 죽여서 뭐할라고? 당신이 얘를 죽이면 내가 가만이 안 있을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소년 상설은 탕정면사무소 창고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다.
지서장은 그에게 "앞으로 애국하며 살아"라고 훈계했다. 사실 상설은 창고에서 나오면서 '오늘 저 세상으로 가는가 보다'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1950년 11월 8일경의 일이었다.
장학재단 설립하고 140억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