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거리에 건립된 전태일 반신상2005년 청계천 6가 버들다리(전태일 거리)에 조성된 전태일 반신부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신상 바닥 동판에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 문구를 남겼다.
하성환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공간에서 전태일은 15시간씩 칼질을 하고 재봉틀에 매달렸다. 어린 미싱사 시다들은 2평 남짓한 작업장에 10명씩 들어가 일했다. 10평 조금 넘는 공간에 40명이 넘게 모여 14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다. 환기구도 없고 허리를 펼 수조차 없는 낮은 작업 공간은 항상 먼지투성이였고 어린 여공들은 폐 질환에 쉽게 노출되었다.
전태일 또한 1967년 재단사 신분임에도 육신의 고통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육신의 고통보다 매일 마주하는 노동현실 앞에 정신적 고통이 훨씬 컸다. 특히 어린 여공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 앞에 전태일은 마음이 아팠고 변화하지 않는 노동 현실에 분노했다. 1966년 재단 보조였을 당시 자신의 차비 30원을 아껴서 풀빵 30개를 사와 열서너 살 어린 여공들 6명에게 점심 대용으로 나눠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봉구 기슭까지 걸어 다녔다. 자신을 내어주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분신한 날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몸으로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약속을 하며 다짐을 받았다. 전태일이 어머니에게 힘겹게 던진 첫 마디는 이러했다.
"어머니, 놀라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천천히 어머니께 약속을 하듯 다짐을 받았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 조영래(2005). 『전태일 평전』. 돌베개. 299쪽.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 손을 꼭 잡고 눈물로 대답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전태일은 비로소 웃으며 마지막 말을 힘겹게 이어갔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자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들에게 다짐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청년 전태일은 13-14세 어린 영혼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었다. 어린 여공들이 처한 가혹한 노동현실에 분노했고 각혈을 하며 쓰러진 어린 여공을 보면서 삶의 가치관이 변화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고 틈틈이 독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노동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신념은 더욱 단단해져갔다. 어느 한 순간도 어린 여공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을 넘어 불의한 노동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주고자 했다.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고귀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우리사회 깊숙이 그리고 넓게 파장을 일으켰다. 당대 지식인과 종교인의 대오 각성은 물론 1970년대 노동야학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아가 1980년대 초 대학생들 상당수가 넓은 길을 마다하고 노동현장에 자신을 투신하며 좁은 길을 결단한 것 역시 모두 전태일의 희생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제 더 이상 고결한 영혼의 죽음을 왜곡해선 안 된다. 나아가 매일 6-7명이 일터에서 추락해 죽고 압사당하는 참극이 더 이상 되풀이돼선 안 된다.
전태일 열사의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피검돼 학살당했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 또한 정신대로 끌려갔다 도망 나왔다. 아버지 전상수는 해방 직후 대구 노동자 파업에 참여했다 고초를 겪었다. 전태일 집안을 보면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 세대부터 노동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은 손자 세대까지 3대에 걸친 고난의 시절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전태일을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2020년 11월 전태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22살 청년노동자의 죽음, 그 아름다운 영혼 앞에 산재사망사고 2,000명 시대라는 '야만'을 이젠 종식시키고 세계 10위 경제대국에 걸맞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51년이 지난 오늘날 22살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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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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