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6일 돌봄전담사파업 당시 모습
학교비정규직노조
<새벽의 약속>에 나오는 로맹은 여자친구 발랑틴에게 뽀뽀를 받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과 3알을 돌리기 시작해 '학교에서, 복도에서, 친구들 앞에서' 열심히 연습한 결과 오렌지 다섯 알에서 여섯 알을 돌릴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렌지를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위해 매일 매일 돌리는 오렌지가 있다. 엄마, 아내, 책, 운동, 글쓰기, 돌봄 전담사라는 오렌지를 돌리며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중 돌봄 전담사라는 오렌지가 가장 컸다. 이건 내 직업이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돌보고 있는 돌봄 아이들은 맞벌이, 다문화, 한부모, 다자녀로 구성되어 있고, 누가 봐도 사회적 약자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명목하에 학교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 이 아이들이 '고위공직자나 재벌, 국회의원 등의 자녀라면?' 이렇게 쉽게 학교 밖으로 내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들은 안전한 학교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고, 공적 돌봄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권리가 있다. 나는 현재 나와 우리 돌봄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생긴 변화
나의 싸움은 코로나19와 함께 시작되었다. 코로나19는 순식간에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 2020년 1월 말에 시작된 코로나19는 3월이 되어도 끝날 줄 몰랐고, 현재진행형이다. 2020년 3월에 학교는 개학하지 못했다. 겨울 방학에도 쉬지 않고 운영되던 초등 돌봄교실은 코로나로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정교사들이 재택 근무할 동안 '긴급 돌봄'이 시작되었고, 긴급 돌봄의 아이들은 오로지 돌봄 전담사들의 몫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였던 우리 돌봄 전담사들은 '긴급 돌봄'을 충실히 수행했다. 책상과 교실 소독은 물론, 발열 체크도 수시로 했고, 손 소독을 강조하고,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리는 아이들을 지도했다. 교육청에 출석 인원을 보고하고, 간식과 점심도 챙겼다. 교차 근무로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근무하는 날에는 이 모든 일과 함께 저녁밥까지 먹이고 퇴근해야 했으니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개학은 계속 뒤로 밀렸다. 반복된 날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피로가 쌓였고,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다. 왼쪽 목에 불룩한 혹이 생긴 것이다. 너무 놀랐고, 병원에서 갑상선 호르몬 검사를 했지만, 이상이 없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진찰하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자 큰 병원으로 옮겼다. 속이 타는듯한 뜨거운 조형제를 넣고 CT를 찍었다. 혹 부위는 크고 하얗게 보였지만 화학적으로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원하신다면 혹 속의 물질을 주사기로 빼고, 알코올을 넣어 말려 줄 수는 있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은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아니에요. 조금 더 지켜볼게요" 하며 갑상선 암이 아니라는 말에 안심했다. 긴급 돌봄이 계속되는 동안 몸은 더 피곤해졌고, 정신적 긴장도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내 몸이 이러니 알아주세요" 할 수도 없었다. 약을 먹어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목의 혹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5월에 개학했다. 코로나는 여전히 무서웠지만, 계절은 시간에 맞춰 꽃이 피었고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봄의 계절이 오고, 봄바람이 불 듯 돌봄 전담사의 고생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긴급 돌봄'으로 고생한 돌봄 전담사들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솥에 삶아 버리듯,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돌봄교실 지자체 이관'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자체 이관이든? 교육부 소속이든? 월급만 받으면 되는 거지. 뭐가 어때?'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고용 승계는 없다'라는 말은 망치가 되어 내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한번 두들겨 맞은 정신은 빨간불을 깜빡이며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도 몰랐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노조에 대해 '맨날 생떼(?)나 쓰는 사람들'이란 오해와 불신도 있었다. 그래도 믿을 건 학비 노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부 또는 교육청 혹은 학교가 내 목을 붙잡고 흔드는 것을 알아챈 후 목이 몹시 아팠고(이때까지도 목에 생긴 혹도 없어지지 않았다), 단칼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 발로 노동조합 연수에 찾아가게 되었고, 이후로 2020년 11월 6일 총파업에 참여하기까지 많은 일이 지나갔다. 총파업에 다녀온 후 일기를 썼다.
"생수 40병과 귤 5kg 2박스를 준비하는 담당이라 무거웠다. 신갈 굴다리 밑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남편이 태워줘서 고마웠다. 오전 10시 30분에 노조원들을 만나 관광버스에 올라타면 되는데, 9시 30분에 도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1시간 동안 시외버스 터미널 대기실에서 책을 읽었다. 김민섭의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라는 책이다. 지난번 수지 도서관에서 있었던 저자의 zoom 특강을 듣고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지방 대학에 인문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겪었던 비정규직의 설움과 불합리에 대한 일들을 써 놓은 책이었는데, 내 이야기 같아서 술술 읽혔다. 이 작가의 zoom 특강은 내게 큰 울림을 줬다. '당신 인생에 부조리가 들어왔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대답해야 합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작가님은 책을 썼고, 대학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내게도 지금 그런 위기가 닥쳤기에 나 스스로 대답을 찾기 위해 노조 연수를 들으러 갔었다."
10시가 넘어가자 노조원분들이 속속 도착했다. 처음엔 파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노조원분들이 막판에 동참해줘서 버스에 28분이 탔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지만, 목적이 하나였기에 반가움이 컸고 고마웠다. 교육부 앞에서의 파업은 내게 커다란 힘을 줬다. 전국에서 모인 초등돌봄 전담사들을 보며 '나 하나는 미약하지만, 그 작은 힘을 보태면 큰 힘이 될 수 있겠구나!'를 느꼈다. 그러나 간간이 비가 내릴 때는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도 들어 살짝 슬프기도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교육부 파업 참여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씩 했다.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 한다' '자꾸 뒤로 뺐는데 오늘 파업 집회를 보고 느낀 점이 많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공적 돌봄은 꼭 지켜져야 한다' 등 다들 공감되는 말씀을 나눠주셔서 좋았다. 그렇게 연대의 힘을 느꼈고, 이렇게 하면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목에 있던 혹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