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런 신화와 이야기가 깃든 경주 계림.
경북매일 자료사진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세상에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은 언제나 흥미롭다. 인간의 상상력과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감성을 자극하기에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늘의 신(神) 몸의 일부분이 파도가 일으킨 거품과 뒤섞여 조개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프로디테였다. 신화에 매혹된 수많은 조각가들이 대리석을 깎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옛날 북유럽 사람들은 남쪽의 뜨거운 불꽃이 거대한 얼음 기둥을 녹였고 거기서 생겨난 거인이 자신들의 선조라는 전설을 믿었다.
그리스와 로마,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떠도는 이러한 신화와 전설이 한국이라고 없겠는가. 당연지사 있다.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계림(鷄林·사적 제19호)은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한 설화가 서린 공간 중 한 곳이다.
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며,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신성한 숲을 왜 용의 숲이나 봉황의 숲이 아닌 '닭의 숲'이라 불렀을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토착종교와 국가제의>가 이 궁금증에 답해준다.
"닭은 신라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씨 시조설화를 보면 닭이 울어서 김알지의 탄생을 인간 세상에 알렸다. 이에 알지가 나온 시림(始林)을 계림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았다 한다. 신라인들이 닭을 숭상했음이 인도에까지 알려졌다는 기록도 있다…(중략) 김씨 집단은 닭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동물로 여겼고, 그들이 5세기 이후 왕위를 독점하는 왕실세력을 이룸으로써 신라는 닭의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마총에서 계란 실물이 토기에 담겨 출토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비밀스런 숲이 반기는 '전설 깃든 계림'으로
거대한 왕릉이 눈길을 끄는 대릉원 입구에서 내려 첨성대 쪽으로 잠시 걸어가니 저만치 짙은 그늘을 드리운 계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램 스토커(1847~1912)의 소설에 등장하는 드라큘라. 그 흡혈귀가 산다는 동유럽의 숲은 빽빽한 침엽수와 축축한 늪 탓에 낮에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 음산하다고 한다. 즐거운 피크닉을 즐기기엔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계림은 달랐다. 회화나무와 왕버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환한 햇살 아래 저마다 멋을 뽐내는 계림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정하게 방문객을 반기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찰랑거리며 숲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울이 정감을 더해줬다.
계림 안에 마련된 조그만 나무의자에 앉았다. 오후의 햇살이 오래전 연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최적의 피서지'인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 계림이라 불렀다. 탈해왕 4년에 왕이 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환한 빛이 가득해 신하를 보내 살피도록 했다. 가보니 금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왕이 궤짝을 여니 그 속에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이 아이를 하늘에서 보낸 것으로 믿어 태자로 삼았다. 이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캄캄한 밤, 조용한 숲에서 갑자기 비산하는 환한 빛, 느닷없는 하얀 닭의 울음소리, 새벽에 발견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궤짝, 그 안에 담긴 귀여운 아기... 그야말로 신화나 전설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재밌는 이야기다. 사람이 드문 평일 한낮의 계림. 전설 혹은, 신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사실 독특한 출생 설화를 가진 신라 사람들은 김알지 외에도 여럿이다. 탈해왕은 동해 아진포로 밀려온 배의 작은 상자 속에서 부모를 알 수 없는 상태로 발견됐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14대 왕 유례이사금은 어머니 박씨가 밤에 길을 걷다가 별빛이 입에 들어오면서 잉태됐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별이 아버지가 된 셈이다.
이처럼 '기이한 출생 배경을 지닌 아이가 현명한 노인에게 발견돼 왕으로 키워지는 과정의 서술'은 신라의 설화가 가진 특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