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의 나운규(라운규) 묘소.
우희철
그는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한 암자에 안치되었다가, 해방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1993년 동료 영화인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현충원에는 '라운규'라는 이름으로 묘비에 새겨져 있다.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됨으로써 독립군 시절 자신이 상관으로 모셨던 홍범도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주제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우리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 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한국영화감독협회는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1990년부터 한국 영화, 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춘사영화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 작가 이전에 독립운동가 주요섭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 패러디물의 소재로 사용된 소설 중 하나가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개봉된 이래, 1978년에도 영화화됐고, 1981년에는 KBS 'TV 문학관'에서 단막극으로 드라마화하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면서 독립운동가인 주요섭. 1902년 평양에서 개신교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요섭(요셉)'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형은 최초의 근대시 <불놀이>로 유명한 시인 '주요한'이며 동생은 극작가인 '주영섭'이다.
주요섭은 1919년 평양에서 3.1 운동에 참가했고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과 비밀리에 독립신문사를 만들고 등사판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1년 19세 때 <개벽>에 데뷔작으로 단편 '추운 밤'을 발표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상하이 삼일예배당에서 '재상해한인학생회'가 개최되었을 때 대한독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야 한다는 취지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3년 상하이 후장대학에 들어간 그는 1925년 <개벽>에 단편 '인력거꾼'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카프(KAPF) 계열 신경향 소설의 대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된다. 1927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개벽>과 <동광> 같은 잡지에 중편 '첫사랑'을 비롯해 단편 '살인', '개밥', '첫사랑값' 등 주로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층 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을 다룬 신경향 소설을 잇달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