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실천시민행동 회원 40 여명은 지난 30일 한국전쟁전후 남한 내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집단희생지로 알려진 대전 산내골령골을 찾아 추모제를 하고 있다.
심규상
유세차(惟歲次)!
때는 바야흐로 1950년, 경인년 호랑이해였어. 왜놈들 물러간 해방 뒤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맨날 서로 못 잡아먹어 그렇게 안달복달을 하더니만 결국은 3.8선이 무너져 6.25 인공난리가 났소.
이른바 남북전쟁, 즉 한국전쟁이 시작이었지. '전쟁 나면 즉각 처 올라가 개성 가서 점심 먹고 저녁은 평양 가서 먹자'고 그렇게 큰소릴 치던 리승만 박사가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기고 남몰래 한강다리를 건너 여기 대전으로 피난 온 후 리 박사는 뒤통수가 몹시 간지러워지고 뒤가 몹시 급해 가는 곳마다 적극적으로 한데 짜고 뭉쳐서 오히려 달려들까 봐 미리 요시찰을 강화하고 좌익 불순분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바로 여기 골령골은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가 되었다네.
- 제발 그만 혀. 나 무서워. 이러다 다 죽어!
오징어게임 아니, 헌병대와 미군의 합작으로 이 살인 게임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대요, 글쎄.
전국에서 예비검속으로다가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으로 또 그렇게 대전형무소서 감방 살던 이들이 한 해 동안 대여섯 차례에 걸쳐 6000여 명이나 죽여 여기 묻혔대요, 글쎄.
좁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5열 종대로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한 상태에서 이마를 땅바닥까지 숙이게 한 다음 드르륵 빠방빵 총을 갈겼대요, 글쎄.
그 길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로 갔대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하네요. 영문도 모르고 여기 골령골로 끌려와 수많은 사람이 죽은 뒤부터 사람들이 죽는 거를 '골로 간다'라구 했대요. 글쎄.
까닭은 글쎄. 왼쪽이라구 또 빨갱이라고 때론 손가락 총으로 지목당해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지금도 억울한 백성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들려와요.
- 지발 살려줘유. 난 왼쪽두 빨갱이두 아녀유. 보도연맹? 난 그런 거 몰라유. 옆집 사는 마을 이장이 가입허믄 고무신두 주고 비료두 준다 해서 도장 한 번 찍은 거빢에 무슨 죄가 있대유?
- 안녕하우꽈? 지들은 제주서 와씸. 겐디 이른바 4.3 빨갱이랍서. 울 하르방 뭐랜 햄신디 살다 보믄 심이 들어도 착하게 살다보믄 저승길가멍도 나 호구시픈 모냥으로 갈 수 있다구 했는디 난 왜 이 모냥 이꼴마씸.
- 거시기 말여. 지들은 여수· 순천이 고향이랑께. 쟈들을 어뜨케 해브까잉. 하나도 모름시로 무조건 제주도 한겨레 4.3빨갱이를 토벌하러 가라는 걸 안 가겠다고 여·순반란군이라구 하제. 마구 빨갱이 폭도라 하제. 이르케 몰려 죽은 게 넘 너무 억울하당께.
- 우짜노. 믄소리고? 우덜은 갱상도 머스마라예. 빨치산두 아니고 불순분자도 아니라예. 근디 먼 친척이 독립운동했다고 거기다 오죽카면 친일파 싸고도는 리 박사도 나쁜 놈이라 캤더니 10년 더 꼽징역을 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서 8년이나 징역 살다 즌쟁통에 뭐라카노 풀려나 좋다커니 하고 고향 가다 저기 대전역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카니.
- 나 안 죽었어요. 총 맞아 반신불수로 평생 고생하느니 차라리 나 좀 한 방 더 쏴서 아예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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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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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의 차이... 우금치 전적지와 산내 골령골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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