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고백한 고 김학순 할머님 생전 모습 1991년 8월 14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고 김학순 할머님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음을 최초로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후 여성, 종교단체가 연대해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가 탄생했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시위가 열려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했다.
정의기억연대 제공
그러면서 "김 할머니는 증언 6년 만인 1997년 폐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래 기억되는 유산을 남겼다"라며 "필리핀, 인도네이사, 말레이시아, 중국, 호주, 네덜란드 등에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 앞에 나오도록 영감을 주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사는 일본군 위안부를 '반인류 범죄'로 규정했던 게이 맥두걸 전 유엔 특별보고관이, 관련해 "내가 보고서에 쓴 어떤 대목도 김 할머니가 직접 증언한 영향력에는 근접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을 전했다.
어렵게 위안부 수용소에서 탈출한 이후 김 할머니의 기구한 삶을 전한 NYT는 "당시에는 성범죄를 당한 여성 피해자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보다는 수치와 침묵 속에서 살도록 하는 문화 탓에 많은 피해자가 과거를 숨겨야 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할머니가 "일본은 위안부를 부정하지만, 내가 그 모든 것을 견뎌냈으며 그것이 실제였다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항의하고 싶었다"라고 증언을 결심한 이유를 소개했다.
"김 할머니,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교수는 NYT에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라며 "그의 증언 덕분에 역사학자들이 증거 문헌을 발굴하고, 유엔이 이를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게 했다"라고 강조했다.
NYT는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법적인 책임을 지고 보상할 것을 요구하며 지치지 않는 활동을 펼쳤다"라며 "하지만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인 1997년 7월 생전 마지막 육성 인터뷰가 담긴
유튜브 영상(바로보기)을 소개하며 부고 기사를 끝맺었다.
"100살이든 110살이든, 살아서 내 귀로 일본 정부와 일왕의 사과를 듣고 싶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기에 죽기 전에 증언하고 싶었고, (일본으로부터)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 말고는 다른 소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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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24년 늦은 김학순 할머니 부고 "20세기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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