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가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순천만 습지.
장호철
주로 물가에 피어나는 갈대는 억새만큼 널따란 군락을 이루기 어렵다. 산을 뒤덮은 억새 군락만큼 흐드러진 갈대 군락은 순천만 습지의 갈대밭밖에 나는 알지 못한다. (관련 기사 :
순천만 갈대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구미의 샛강은 습지여서 더러 갈대 군락이 보이지만, 강변체육공원에는 갈대가 억새 군락 주변에 드문드문 섞여 있을 뿐이다.
갈대, 풍경 대신 시편의 소재가 되다
억새 군락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대신 갈대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 원로 신경림 시인의 <갈대>와 중견 시인 신용목의 <갈대 등본>이 갈대를 노래한 시편들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중략)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전문
속으로 '조용한 울음'을 우는 존재인 '갈대'가 인간 존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파스칼의 명제를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시인은 근원적인 고독과 비애를 깨달은 인간을 연약한 갈대에 빗댄 것이다.
갈대의 소리 죽인 울음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갈대는, 마침내 그 '조용한 울음'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 즉 '울음(슬픔)'도 삶의 본질이라는 걸 깨닫는다.
비극적인 삶에 대한 존재론적 각성을 노래한 이 시는 시인의 초기 작품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시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에서 농촌의 암담한 현실과 농민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농무(農舞)'와 '목계장터' 같은 민중 시로 옮겨 갔다.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
(중략)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 아버지의 뼛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갈대 등본' 전문
신용목 시인의 '갈대 등본'은 폐염전의 배경으로 서 있는 갈대를 '허리 꺾인 가장 아버지'와 이으면서 그 가족사를 노래한다. 바람이 부리는 노복(奴僕), 갈대는 그 생애를 닮은 아버지의 일생과 이어진다. 갈대가 '등본(謄本)'이 되는 연유다.
화자와 갈대, 그리고 아버지를 잇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아버지'의 바람은 아버지가 견뎌낸 고단한 세월인데 화자는 "아버지의 뼛속"에 있는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라며 아버지의 일생을 따르고자 하는 결의와 함께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키가 크고 줄기가 가늘며, 줄기에 비하여 잎이 무성하여 바람에 금방 한쪽으로 쏠리는 속성 때문에 갈대는 쉽게 마음이 변하는 사람에 비기곤 한다. 두 시인은 그런 진부한 비유 대신 갈대를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비애를 깨닫는 존재로, 들판에 선 바람의 생애로 노래한 것이다. 시편을 거듭 읽으며 문득 깊어진 가을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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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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