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표, 직선개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을 머리기사로 올린 당시 <경향신문> 기사
경향신문
노태우의 1987년 6ㆍ29선언은 그동안 잠행해오던 김대중과 김영삼 즉 두 김씨의 경쟁관계를 다시 촉발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느 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두 김씨와 측근들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상도동 측은 당내 기득권을 내세우면서 김영삼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편데 비해, 동교동 측은 계파조직인 '민권회'를 통해 경선준비에 나섰다.
이에 앞서 김대중은 8월 8일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1972년 10월 유신쿠데타로 당원자격을 잃은 지 15년 만에 정당 당원이 된 것이다. 김대중의 입당으로 민주당은 곧바로 후보경쟁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김영삼은 탄탄한 당내조직의 기득권을 배경으로 대통령후보의 조기공천을 주장한 반면, 뒤늦은 사면복권으로 당내기반이 취약한 김대중은 여권의 집중적인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선거 직전에 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반유신 투쟁에 기여한 재야민주인사들을 영입해서 범야 단일후보를 선출하자고 맞섰다. 어느 쪽도 양보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팽팽하게 대결하였다.
통일민주당은 양측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김영삼 측이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전격 선언하고 나서자, 김대중도 11일 사실상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이로써 두 김씨는 적전분열을 감행하면서 분당의 가파른 길로 내닫기 시작했다.
통일민주당에서 후보단일화가 감지되면서 김대중 계열은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서둘렀다. 10월 10일 김영삼 총재가 돌연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하자 사실상 후보단일화의 실패를 인정한 김대중계는 곧바로 신당 창당작업에 나섰다.
10월 29일 통일민주당 내 동교동계 의원 24명과 무소속 1명, 각계 인사 등 51명으로 창당준비위를 구성하고 당명을 가칭 평화민주당(평민당)으로 정한 다음, 10월 30일 창당준비위원회, 11월 12일 창당대회라는 초고속의 창당절차를 밟았다.
한편 6ㆍ29선언 이후 이른바 '3김' 중의 일원인 김종필은 정계복귀 선언을 하면서 구공화당 시절의 각료ㆍ의원을 중심으로 1987년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을 창당했다. 공화당은 10월 5일 창당발기인대회를 거쳐 10월 30일 창당대회 겸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김종필을 총재 및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다.
5공세력인 민정당과 야권의 통일민주당ㆍ평화민주당ㆍ공화당의 잇따른 창당으로 대통령선거는 4파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격동했던 정계의 전사(前史)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