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이한나
정확히 4시가 되기도 전에 우리는 콩을 다 까버렸다. 문득 오래전부터 엄마가 자주 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남편에게 나불거려본다.
"여보~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게 누군지 알아? '눈'이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어렸을 때 엄마가 멸치 다듬자, 마늘 같이 까자 할 때마다 난 정말 무서웠어. 엄청 큰 대야에 어마어마한 양이였거든. 언니들은 다 커서 없고 막내인 나만 시키니까 나 엄청 짜증 냈는데~ 이거 언제 다하냐며~ 이 많은 걸 어떻게 하냐며 말이야.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이런 말을 했어. '세상에서 눈이 제일 게으른 거야. 눈으로 보면 언제 다하나,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보이거든. 눈이 그렇게 우릴 속이는 거야!' 그러면서 부지런한 손이 움직이면 금방 할 수 있다고 한 번 같이 해 보자며 매번 멸치 다듬기와 마늘 까기를 시켰어. 물론 하다가 도망 갔지~ 그땐 끝까지 해본 적이 없는데~~ (헤헤) 어릴 때 엄마한테 듣던 눈이 게으르단 말이 실감이 난다~ 콩 다 깠잖아. 대박이지?"
그렇게 나는 알록달록한 콩들을 비닐에 담으며 뿌듯함을 만끽했다.
마흔이 돼서도 엄마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내가 왜 이리 기특한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가 하는 이야기에 자동적으로 가시를 장착해서 들었던 기억이 크다. 짧게 '잔소리'라는 단어로 정의하면서. 그랬던 내가 엄마의 말을 기억하며 콩을 다 깐 것을 자축하고 있다.
문득 엄마 생각이 떠오른다. 나를 낳고서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15일밖에 안된 나를 업고 한 겨울에 일을 하러 나가야 했던 엄마. 감사하게도 그 엄마는 부족함 없이 딸 셋을 당당하게 키웠고, 아버지가 학업에 몰두할 수 있게 모든 것을 책임졌다.
엄마는 '이걸 언제 다해?!', '하기 싫은데'라며 내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내 몸 하나 고생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우리들을 키워왔으니 엄마의 눈은 게으를 틈이 없던 것이다.
부지런한 엄마의 눈을 생각해보니, 여러 엄마들의 눈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단연 내 눈이다. 남들은 늘 나에게 게으름을 지적하지만 나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눈이다. 밖에서 아무리 벨을 눌러도 잠에서 깨지 않는 내 눈은 아이를 챙겨야 하는 순간에는 7시면 번쩍 뜨여진다. 게다가 혼자 있으면 빵 쪼가리 찾고 있을 눈이 가족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 매번 반짝거리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일하러 가는 날에는 시간을 15분 단위로 쪼개 간식부터 식사 준비까지 마치고 머리에 구르프를 만 채 자동차로 달려가는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엄마다. (때때로 쌀국수를 사 먹으라며 돈을 쥐어줄 때도 많지만.) 얼마나 뿌듯한지, 인증샷을 열심히 찍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