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부경찰서
위키백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구금에서 풀려난 한삼택씨는 퇴직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었다. 그때부터 그의 가족은 생계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다. 자녀들은 간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컸다.
어려운 환경 속에 자랐지만 한경훈씨를 비롯한 육남매는 아버지가 무죄라고 굳게 믿었다. 남매들은 성인이 된 후 여러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아버지 사건 재심이 가능한지 상담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 남매들이 이제 60대가 다 되어 갑니다. 우리 생에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마음을 항상 품고 살다가 재작년 경 친척의 도움을 받아 제주교육감님께 아버지 사건에 관해 면담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주교육청에서 당시 교육청에 출입하는 기자 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수상한 흥신소를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한경훈씨와 형사기록을 함께 검토한 수상한 흥신소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갔다. 한삼택씨가 연행되던 날의 일을 한경훈씨는 어려서 잘 모른다고 했다. 대신 그때 중학생이던 누나 한혜정씨가 아버지가 끌려가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수상한 흥신소는 제주에 사는 누나 한혜정씨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아버지가 잡혀가던 날
한삼택씨가 잡혀가기 전날까지 그의 가족은 평범했다. 교육공무원이던 한삼택(당시 38세)씨는 아내와 육남매를 둔 가장으로 세화중학교에서 근무했다. 당시 세화중학교에 다니던 한혜정씨는 1학년으로 14살, 세화국민학교(현 세화초등학교)를 다니던 한경훈씨는 3학년으로 10살이었다.
그때가 세화국민학교 가을운동회 전이라 한경훈씨는 운동회 생각에 들떠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한혜정씨도 동생의 운동회를 생각하며 신이 나 있을 때였다. 1970년 9월 26일 서무과 급사 선생이 수업을 하고 있던 한혜정씨의 교실 앞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는 잠시 담임과 대화를 했고 담임은 굳은 얼굴로 한혜정씨를 불렀다.
"어서 서무과에 계신 아버지께 가 봐라."
한혜정씨는 '아버지께 심부름 할 일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며 서무과로 갔다. 그때 멀리 복도에서 아버지 한삼택씨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천천히 신었던 실내화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고 계셨고 학교 현관 밖에는 낯선 검은색 지프차가 있었다. 아버지께 손님이 오신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 낯선 사람들의 굳은 표정과 검은색 지프차를 보자 한혜정씨는 불안했다. 혜정씨는 아버지께 다급히 달려갔고 아버지는 차에 타기 직전 혜정씨에게 '엄마에게 빨리 이야기해라'는 말을 반복해서 남겼다.
한혜정씨는 무엇을 어머니께 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무과 직원에게 '아버지가 어디로 가시는지, 누구와 만나는 것인지'를 물어봤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한혜정씨는 그길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