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활동해 온 카이 도시오씨의 모습. 모임을 발족한 2005년(왼쪽)과 2021년 10월(오른쪽) 모습.
심규상
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126주년인 8일 오전 10시 일본 쿠마모토현의 '한일문화교류센터 구마모토'에서 열린 명성황후 추모기념식에 참석, 참배한 후 마지막 강연을 했다. 이날 기념식과 강연은 그가 주도해 만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과 '재일 대한민국 민단 구마모토현 지방본부'(단장 김태문)가 공동주최했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던 카이 도시오씨는 1980년대 어느 날 아소산 국립공원에서 한 한국인 소녀를 만났다.
"그 한국인 소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역사 교사인데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요."
이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나라의 국모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죠. 특히 시해에 가담한 대부분이 구마모토현 출신이라는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실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48명의 일본인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이다. 카이씨는 이때부터 수십 권의 책과 논문을 찾아 읽었다. 교사 퇴직 후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자신이 직접 재조사하듯 확인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직후인 2004년 11월에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카이씨가 주로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시해범들의 행적이다.
"시해 사건 가담자들이 어떻게 참가하게 됐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건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지, 어떻게 살았고 언제 죽었는지,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그 후손들은 무엇을 하는지 등을 조사했습니다."
이같은 조사 결과를 큰 종이에 직접 썼다. 이를 들고 다니며 일본 시민들에게 알렸다.
"당시 히로시마 재판부의 기록에 의하면 미우라 고로(일본을 대표하는 조선국 주차공사) 공사가 외무성의 기밀비를 사용해 낭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공사에게 기밀비 형태로 시해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당시 한성신보사(일본인 아다치 겐조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선전 기관지로 1895년에 창간한 신문. 일본외무성의 기밀보조금으로 창간됐다-기자주) 사장 아다치가 구마모토 출신이었는데 이 사람이 미우라 공사의 의뢰에 따라 구마모토 낭인들을 동원했고 때문에 구마모토 출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후 48명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됐습니다. 일부는 일본 고위직을 지내기도 했죠. 지금도 명성황후 시해를 치적으로 새겨 자랑까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각하는 모임 만들고 16차례 홍릉 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