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셀프가 뭐꼬?"... 인사동에 찾아온 변화

인사동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인사동 한글 지킴이 여해룡 선생의 노력

등록 2021.10.04 14:59수정 2021.10.0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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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쓴 글 옆에서 여해룡 선생 여해룡님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증손이다. 원로시인이며 종합문예지 한맥문학의 편집인으로 86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특히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
직접 쓴 글 옆에서 여해룡 선생여해룡님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증손이다. 원로시인이며 종합문예지 한맥문학의 편집인으로 86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특히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유원진


"물은 셀프가 뭐꼬?"


오랜만에 나간 협동조합 매장에서 지인들과 저녁을 먹다가 손님들이 물은 어디에 있느냐고 컵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다 못해 정수기 옆에 붙이려고 굵은 펜으로 쓰고 있는데 한 칸 건너편에서 꼬장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물은 직접 가져다 마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걸 몰라 묻나? 좋은 우리말 두고 먼다고 셀프라는 말을 쓰나 그 말이라."


하기야 원로시인이자 인사동 터줏대감인 선생님이 그걸 몰라서 물었을 리 없는데 나 또한 그다음 진도를 몰라 멀뚱거렸다. 일단 물은 셀프까지는 썼으니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되겠기에 일어서려는데 선생님이 당신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신다.

"가서 좀 큰 종이를 가져와라. 눈에 잘 띄게 하나 써줄게."

달력 종이를 하나 북 뜯어다 드렸다. 가방에서 굵은 붓 펜을 꺼낸 선생님은 그야말로 이런저런 재단도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전통 찻집 인사동의 전통 찻집에 선생님이 직접 쓰시고 코팅까지 해서 붙여 놓았다. 만약 저 자리에 물은 셀프라는 글귀가 붙었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훨씬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전통 찻집인사동의 전통 찻집에 선생님이 직접 쓰시고 코팅까지 해서 붙여 놓았다. 만약 저 자리에 물은 셀프라는 글귀가 붙었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훨씬 더 어색할 것 같았다.유원진

 
"물은 손수 가져다 드십시오."



참으로 어색했다. '손수'라는 딱 두 글자로 대체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긴 하다. 하기야 정수기 옆에 물이라는 한 글자만 써 붙여도 갖다 먹으라는 암묵적 소통은 되는데, 한 문장으로 '갖다 드십시오' 하니 뭔가 어색한 그림 같았다. 그래도 어르신의 좋은 뜻이니 받들어 붙이고는 멀찌감치서 한 번을 더 보니 그럴듯하긴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뜻밖에 괜찮았다. 그것으로 대화의 주제도 삼더니 이어서 옛날 '써클'이라는 확고한 뜻의 영어가 '동아리'라는 더 확고하고도 좋은 뜻의 우리말로 바뀌고, 그 바꿈을 주도한 사람이 얼마 전 작고하신 백기완 선생님이라는 대화로까지 이어졌다.


며칠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은 한글과 한글학회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 지금도 '물은 셀프'라고 써 있는 식당에 가면 그것을 고쳐 써 보려고 애를 쓴다는 말을 들으니 아무 생각 없이 타성에 젖어서 했던 내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따라나서 봐라."
 
 
선생님을 따라 인사동의 냉면집과 전통찻집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인사동 냉면집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영어와 병기했다는 주인의 설명이 있었다.
인사동 냉면집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영어와 병기했다는 주인의 설명이 있었다.유원진
 
"저거 다 내가 사장들 설득해서 고쳐 붙인 거라. '물은 셀프'보다 훨씬 낫지 않겠나? 근데 내가 지금 나이가 86인데 언제까지 이걸 할 수 있겠나? 인자는 늙은이라고 뭔 말을 해도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그러니 젊은 너희가 좀 열심히 해라. 딴 데는 온통 영어가 지배한다 해도 여기는 전통의 인사동인데 물은 셀프가 뭐꼬? 쯧쯧."
#한글날 #한글사랑 #인사동 #여해룡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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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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