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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빠지니, 유튜브도 드라마도 끊게 만든 '이것'

일동장유가를 필사하며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다

등록 2021.09.29 13:22수정 2021.09.2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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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은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집을 나선다. 이날은 늘 사용하는 휴대전화 외에 공기계 하나를 챙겨서 미리 가방에 넣어 둔다. 실상 매너 모드로 해놓은 휴대전화는 수업하는 내내 사용을 못 하는 대신 공기계가 십분 제 기능을 발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놓치기에 십상인 강의 내용을 녹음하거나, 후다닥 지나가는 영상 자료를 촬영해 두면 학습 매니저로 이만한 게 없다. 혼자만 이 요란을 떨면 눈치도 보통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닐 텐데, 나이 많은 수강생들이 함께하다 보니 비슷한 부류가 적지 않다. 속내야 알겠냐마는 강사님들도 크게 눈치를 주거나 저지하지 않으니, 불량스러운 수업 태도는 제동이 걸리지 않은 채 몇 달째 이어졌다.
 
 같은 수업을 듣는 수강생 한 분은 정성 들여 꼼꼼하게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수강생 한 분은 정성 들여 꼼꼼하게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박진희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강의를 수강할 때다. 수강생들 사이를 걷던 강사님이 화들짝 놀란다.

"아니! 선생님, 공책 정리를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하셨어요"

평소에 지각 한 번 안 하고, 과제 한 번 안 밀리는 모범생의 공책을 들여다본 강사님의 반응에 뭇시선이 한곳으로 쏠린다. 쉬는 시간이 되자, 우르르 몰려든 수강생들은 모범생의 노트를 보고는 한결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누가 봐도 타이핑한 것마냥 깔끔한 필기였으니. 정서한 노트를 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다른 수강생들과 달리, 뜨끔! 나는 살짝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 돌아갈래!

어려서는 학교 선생님이든 집안 어르신들이든 연필만 잡았다 하면 "글씨 바르게 써라"가 인사였다. 귀에 딱지가 내려앉게 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도 또박또박 예쁜 글씨를 쓰려 애썼다. 그 덕분인지 필체가 나쁘단 소린 안 듣고 자랐는데, 세상이 좋아져 필기구 잡을 일이 줄어들면서 요즘은 어쩌다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 나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휘갈겨 쓰는 게 다반사다.
 
일동장유가 필사집 계미년에 통신사 서기로 간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이 쓴 한글기행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로 총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 디자인은 '일동장유가'의 글씨(오른쪽 회색)와 '문체부 궁체 흘림체(왼쪽 검은색)' 일부를 조합하여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일동장유가 필사집계미년에 통신사 서기로 간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이 쓴 한글기행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로 총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 디자인은 '일동장유가'의 글씨(오른쪽 회색)와 '문체부 궁체 흘림체(왼쪽 검은색)' 일부를 조합하여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박진희
 
 <일동장유가> 제1권의 첫 페이지 필사를 끝냈다.
<일동장유가> 제1권의 첫 페이지 필사를 끝냈다.박진희
 
지난 4월부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원장 조한필)에서는 공주시와 함께 2021년 세계유산문화 활용프로그램(조선통신사, 공주에 납시었네)의 일환으로 '집콕, 일동장유가 필사 챌린지'를 진행하고 있다.


모집 선착순 200명에 들어 <일동장유가>의 필사집을 받아들었을 때의 벅찬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763년(영조 39년)에 조선통신사 수행으로 뽑혀 일본에 다녀온 퇴석 김인겸이 쓴 총 4권의 기행가사 <일동장유가>는 한글로 기록된 데다, 필사집의 필사면을 채우는 비교적 손쉬운 비대면 프로그램이어서 며칠 내에 끝낼 것을 자신했다. 오죽 의욕이 넘쳤으면 연필로 한 번 쓰고, 그 위에 볼펜으로 덧쓸 각오를 다졌겠는가.

그러나 제1권의 몇 장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막상 퇴석 선생이 쓴 바른 글씨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글자 한 글자 공을 들이다 보니, 평소 습관처럼 마구 휘갈겨 쓸 때와 천양지차라 너무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 궁금한 단어와 모르는 인물을 살펴 가며 써 내려가다 보니, 소요 시간은 예상보다 3~4 갑절은 걸렸다. 마음먹은 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슬그머니 흥미가 사라질밖에. 얼마 못 가 필사집은 이 핑계 저 핑계 끝에 책장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게 됐다. 

기록, 글자에 뜻을 입힌 것

서서히 내 기억 속에서 <일동장유가>의 필사집이 잊혀져 갈 즈음이다. 필사집을 받은 지 한참 만에 프로그램 담당자와 통화를 하게 됐다. 

"아무래도 10월 말까지 4권은 못 끝낼 것 같아요..."
"가족들과 나눠서 하시는 방법도 있어요. 본래 사업 취지에 부합하기도 하고요."


위안이 되는 통화를 마치고 나서 마음을 다잡았다. 고이 모셔둔 <일동장유가>의 필사집을 다시 꺼냈다. 어쩌면 프로그램 담당자의 조언대로 최후의 전술을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남은 한 달간 혼자서 마지막 스퍼트를 내 볼 생각이다. 천만다행으로 소싯적처럼 글씨체를 가지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 찜해놓고 보는 드라마나 구독하고 싶은 유튜브 채널도 없다. 

설령 일정대로 4권의 필사를 끝마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마지막 장까지 마무리는 지을 생각이다. 퇴석 선생이 <일동장유가>를 통해 후세에 전하고자 한 대의의 편린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일동장유가 #조선통신사 #문화재청 #문화유산 #충남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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