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전통적인 차례상.
pixabay
좋고도 싫은 명절. 누군가는 추석을 '가부장제 축일'이라고도 비꼬던데, 그래서인지
혜미씨가 말했던 '무급-가족-종사자' 여성들 얘기가 자주 생각났어요. 전 부치기부터 송편 빚기, 차례상 차리고 치우기까지 여성들의 무급노동이 가장 많이 동원되는 때가 명절이잖아요. 각자 다르게 살아온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 언쟁을 벌이고, 그게 폭력으로 이어지는 일도 부지기수고요.
추석 직후인 23일 경찰청에 따르면, 시부모 간병 문제로 다투다 아내를 폭행한 남편이 검거되는 등 가정폭력 사건은 여전했다고 합니다. 특히 전년도 추석 대비 아동학대 신고가 60% 가량 늘어났대요. 코로나로 모두가 단절된 요즘, 어딘가엔 어른들 학대 속에 방치된 아이들이 있겠구나 싶어 걱정이 돼요.
결혼 뒤 추석은 딴 세상... 가족, 당신에겐 어떤 의미인가요
어떨 때는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별이나 국가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는데도 평생을 그 영향 안에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혜미씨에게 가족은 '힘'인가요, '짐'인가요?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제게 가족은 언제나 힘이 되는 쪽이었거든요. 아버지의 빚보증이 잘못 돼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부모님은 제게 늘 날개가 돼주려는 분들이셨어요. 그러나 어떤 이에게 가족은 평생 짊어질 짐이기도 하다는 걸, 어떤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며 성인이 돼도 신체·언어적 폭력을 저지른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혼인이 대등한 두 성인의 결합이라기보다는, 가족과 가족 간의 만남이라는 것도 결혼 뒤에야 확실히 알게 됐어요(과거의 저 순진했네요...^^).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른 두 집안이 만나 빚어내는 차이가 상상 그 이상이라는 것도요. 먼저 결혼한 선배들이 '시월드'라는 말을 빚어낸 데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요. 시-월드(world),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의미였나 봐요.
저는 사실 결혼을 한 계기 중 하나가 법적인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는데요. 몇 년 전 남자친구가 갑작스러운 맹장염이 와서 수술동의서에 혼자 사인하고 수술을 혼자 겪어내고, 회복실에 누워 있다가 뒤늦게 온 저를 본 뒤 엉엉 운 일이 있었거든요. 그와 만나는 동안 제 질문은 '꼭 결혼이어야 해?'였는데, 그 뒤엔 '결혼이 아니어야 해?'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로 아끼는 두 성인의 결합이 꼭 번거롭고 복잡한 결혼 제도를 통해야만 하는 걸까요. 2014년 발의 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된 '생활동반자법'이 유력한 대안이리라 생각합니다. 해당 법이 생길 경우, 두 성인이 국가에 신고하면 둘을 법적 관계로 간주한다고 해요. 결혼과 비슷하지만 훨씬 가벼운 거죠.
생활동반자법을 다룬
책 <외롭지 않을 권리>를 읽으며 "이 법이 생긴 뒤의 결혼은, 여러 선택지 중 적극적으로 내가 선택한 행복의 방식이 된다"는 문장이 특히 와닿았어요. 선택지가 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