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라이어슨 공과대학 입구 앞에 학생들이 서 있다.
ryerson university
영국과 프랑스인들이 들어와 캐나다라는 나라를 세우기 훨씬 전부터 이 땅에는 원주민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었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땅뿐만이 아니었다. 캐나다 정부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폈고 '기숙학교'는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1996년까지 100년 넘는 기간 동안 15만 명의 원주민 아이들이 부모와 공동체에게서 떨어져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박탈 당하고 백인의 문화와 관습을 강제 당하는 과정에 수많은 아이들이 학대와 방임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올 여름, '땅속 탐사 레이더'를 통해 옛 기숙학교 부지에서 1000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의 유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처참한 광경은 비단 원주민 공동체만이 아닌 캐나다 전역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었고, 라이어슨 대학교 개명 운동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에거튼 라이어슨, 그가 바로 기숙학교 시스템의 주 설계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캠퍼스 내에 세워져 있던 그의 동상은 유해 발견 사건으로 분노한 이들에 의해 끌어져내리고 목이 잘리는 훼손을 당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차후에도 동상 복원이나 교체는 없을 것임을 밝혔다.
개명을 향한 논란이 커지자 학교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학교 이름, 에거튼 라이어슨이 남긴 (부정적 의미의) 유산, 그 외 (그와 관련된) 기념요소들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진행했다. 역사 고증과 더불어 지역사회와의 대화, 약 6000개 설문조사 검토 등의 작업도 함께 이뤄졌다.
이후 대책위원회는 학교 이름 변경, 에거튼 라이어슨의 부정적 유산을 공인하는 자료 공유, 원주민 역사와 식민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더 많은 기회 제공 등을 골자로 하는 22가지의 권고사항을 제시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교수들, 또 수백 명의 직원들이 서명한 개명 요구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제는 라이어슨을 기리는 일을 멈추어야 할 때다."
"논쟁은 끝났다. 평등, 다양성, 포용이라는 명백한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압제와 집단학살은 우리 사회에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8월, 대책위원회의 권고가 받아들여져 개명이 결정됐다.
"교체 비용? 변화를 지지하는 기부자 상당할 것"
지난해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불타오른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그리고 올 여름 기숙학교 원주민 어린이 유해 발굴 사건으로 인해 캐나다인들은 점점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인종차별 및 원주민 학대와 관련된 이름들을 주시하고 있다.
라이어슨 대학의 개명 결정이 원주민들의 피해와 아픔을 돌아보고 어두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일이라면, 얼마 전 토론토 '던다스 스트리트'(Dundas Street)의 이름 변경 결정은 흑인들의 인권이 짓밟혔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당위를 담고 있다.
던다스 스트릿이라는 이름을 제공한 '헨리 던다스'는 노예제 폐지를 지연시킨 스코틀랜드의 정치인이다. 상상만으로도 불쾌하지만 만약 한국에 '이토 히로부미 길'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보니, 던다스 스트릿을 바라볼 때 흑인들이 느꼈을 감정이 단박에 이해가 됐다.
하지만 오래도록 사용되어 온 거리나 기관의 이름 변경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이 그에 따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2년 이름을 바꾼 웨스턴 대학의 경우 20만 달러(약 2억3436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보고된 바 있다. 이름 변경 프로젝트의 범위 내에 있는 건물이 40개, 프로그램이 141개, 그 외 스포츠 대표팀들까지 있다고 하니 협의 과정, 디자인 변경, 시행 과정 등을 고려해볼 때 라이어슨 대학이 치르게 될 비용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 변경으로 인해 대학이 앞으로 얻게 될 모금액도 상당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논란을 겪으면서 라이어슨 대학이 기부자들을 잃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기숙학교와의 연관을 끊음으로써 기금 모집에 도움을 받으리란 것이다. 기금 모집 컨설턴트 회사 대표 구이 말라본의 말을 들어보자.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 특별한 이슈는 매우 강렬합니다. 재정 지원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지지하는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반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기부자들은 사회적 관심사와 진보적인 생각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포용, 다양성, 평등은 점점 더 많은 기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라는 것이다.
소비자도 '가치'를 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