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심은 고추모가 고추가루로 되었어요정성들여 말린 고추가 드디어 방앗간에서 고추가루로 재탄생, 무려 11근이나 나왔습니다.
박향숙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친정골목길에 있던 OO방앗간에 가면 명절 때 떡은 기본이고, 고춧가루 만들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아프다고 가게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더니, 마침내 가게의 종료를 알리는 안내장이 붙었다. 동네사람들은 아저씨의 발병에 안타까워했고 50년이 넘도록 돌아간 쌀방앗간의 기계들과 작별을 했다.
오늘 고춧가루를 만들어야겠다고 하니, 친정엄마는 전통시장의 OO방앗간으로 가라고 했다. 김장용으로 쓸 거니 너무 곱게 갈아도 안 되고, 너무 거칠게 갈아도 안 된다고 꼭 말하라고 했다. 사실, 어느 정도가 김장용이고, 고추장용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엄마의 말만 전하고 방앗간 주인장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고추를 들어보니, 무게가 제법 무거웠다. 정확한 무게 단위는 몰랐지만 최소 10근(6kg)은 되었으면 했다. 김장하실 때 엄마가 주문하는 고추 양을 알고 있었기에, 최소한 내 김장을 하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했다. 지난주에 심은 배추 100여 포기를 잘 길러서 고춧가루와 함께 올해 친정집 김장 재료로 선물할 예정이었다.
방앗간의 입구에 할머니들이 계셔서 들어가면서 물어보았다.
"저 고춧가루 만들려고 왔는데요, 여기서 하나요?"
"고추 빻을려고? 당연히 하지. 저기 주인 나오네. 방송에도 나온 유명한 사람이여."
"아, 그래요? 어떻게 유명하신 분인데요? 고춧가루를 잘 만들어 주시나봐요."
"고추가루는 말할 것도 없고, 들기름 참기름 짜는 기술자여. 저기 상표를 봐."
체구가 작은 아저씨가 나오더니, 가져온 고추를 달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묻지도 않는 말을 열심히 설명했다. 취미로 텃밭을 하는데, 거기서 나온 고추라고, 김장할 거니까 가루로 잘 좀 만들어 달라고, 청양고추랑 외고추랑 섞어서 해달라고 했다. 고추는 말리기가 힘든데 잘 말렸다고 한 10근은 넘겠다고 말했다. 10근이나요? 그러면 정말 좋지요!
오랜만에 고춧가루 분쇄기계로 들어가는 고추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옆에 있던 할머니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젊은 사람이 고추 농사를 어떻게 지었냐고 물었다. 우리 부부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노령의 할머니들 앞에 서면 어느새 어린애 같은 자세로 바꿔지고 칭찬해주는 분들 덕분에 어깨가 으쓱해져서 열심히 텃밭 얘기를 했다.
고춧가루 분쇄기에 들어간 고추는 신기하게도 고추씨가 별도로 나왔다. 마치 캥거루 앞주머니처럼 생긴 부속품 속으로 고추 씨앗이 떨어졌다. 고추씨의 용도를 물으니 고추씨 기름으로도 쓰고, 특히 짬뽕을 만들 때 "아주 최고"라는 답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가져가도 되냐고 물으니, 일반 집에서는 가져가봤자 필요도 없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친정엄마한테 혼만 났다. 당연히 챙겨와야지, 그냥 왔다고.
고추는 3가지 종류의 분쇄기를 통해 대 여섯 번 정도의 빻기 과정을 거쳐서 고운가루로 나왔다. 올봄 4월에 고추모를 심을 때 상상했던 고춧가루의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6개월간, 우리 부부의 땀과 수고 그리고 기다림의 댓가를 모두 담고 나와서 고생했다고 격려해주는 생물 같았다. 빻는 데 든 비용도 7000원 밖에 되지 않아서 주인장 아저씨의 작품이라는 들기름과 참기름을 샀다.
도구에 고스란히 남은 주인장의 손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