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국사편찬위원회
박재혁,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이 소년은 1895년 5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왜관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했다.
박재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재를 싱가포르까지 확대한다. 그는 상하이와 싱가포르, 부산을 오가며 인삼 중개 무역을 진행했다. 100년 전 이미 국제무역상으로 활약했던 박재혁이 얼마나 뛰어난 상재를 지녔는지, 그의 일본어와 중국어가 얼마나 유창했는지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놓쳐선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박재혁은 이미 부산진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독립운동에 눈을 떠 활동해 왔다. 1907년 열두 살 아이에 불과했던 박재혁은 친구 최천택과 김영주, 백용수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한다. 부산공립상업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구세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동국역사 배포 사건' 등을 주도한다. 국제무역상으로 이름을 날린 박재혁이 1920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의열단 의백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원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던 일.
의열단은 경남 밀양 출신 약산 김원봉이 1919년 11월 중국 지린에서 설립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다.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천한다'는 뜻 아래 7가살, 5파괴를 목표로 삼았다. 7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 타이완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토호 등이다. 5파괴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주요 기관이다.
그러나 수개월을 준비한 국내 진입 암살파괴 계획은 밀정과 일본 경찰에 의해 거사를 진행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만다. 의거를 준비했던 의열단원 수십 명이 대대적으로 검거됐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특히 일제 부산경찰에 의해 체포된 의열단 단원들의 고초가 매우 컸다.
이에 약산 김원봉은 싱가포르에 머물던 박재혁에게 전보를 쳐 '상하이에서 만남을 갖자'고 연락한다. 의열단 공약 10조 중에는 '초회에 필응할 것'이 명시됐다. 전보를 받은 박재혁은 곧바로 상하이에 돌아왔다. 박재혁을 만난 약산 김원봉은 말한다.
"동지들의 복수를 위해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약산 김원봉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박재혁에게 다소 무리한 요청을 한다.
"(서장을) 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되어. 제가(스스로) 누구 손에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알도록 단단히 수죄를 한 다음에 죽여야 하오."
의열단 명령을 받은 박재혁은 이를 수행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자산을 정리해 중국 고서상으로 위장한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가 중국 고서를 좋아한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 완벽하게 산동의 고서상 차림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그 길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한 '가기허다수익'이면 '불가기재견군안'도 이즈음 배편에서 박재혁이 상하이에 있는 동지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엽서 내용이다.
1920년 9월 어렵게 부산에 도착한 박재혁은 의열단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부산경찰서로 향한다. 어려움 없이 서장 면담을 득한 박재혁은 안내를 받고 부산경찰서 2층에서 서장을 만난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장과 마주한 박재혁은 상하이에서 구입한 고서를 건넨다. 봇짐에서 이런저런 고서를 꺼내 건네던 박재혁은 마침내 의열단의 성명이 적힌 전단을 보이며, 유창한 일본어로 서장을 향해 외친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의 소행으로 우리 동지들이 모두 구속돼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네놈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다. 죽어 마땅한 줄 알고 있을 거다."
말을 마친 박재혁은 봇짐 바닥에 몰래 숨겨온 폭탄을 꺼내 탁자 한가운데 두고 바로 터트린다. 박재혁과 하시모토 사이의 거리는 두 척에 불과했다. 이 폭발로 하시모토는 큰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근처에 있던 일본경찰 2인도 큰 부상을 당한다. 박재혁 역시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은 이듬해 단식을 통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공동묘지에 묻혔던 박재혁... 1969년 현충원에 잠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