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황제 푸이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는 신해혁명 이후로도 한때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보장받았으나 핍궁사건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청나라 황릉 도굴 사태까지 벌어지자 격노한 선통제는 일본에 합류하여 만주국 집정에 취임,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만주국 황제에 올랐다.
wiki commons
선통제 푸이는 청 황실 우대조치가 폐지되고 난 뒤 온갖 굴욕과 박대를 감내하고 있었고, 관동군은 국제사회의 눈을 속일 괴뢰정권의 간판이 필요했으므로 일단 이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건국이 선포됐고 선통제 푸이는 새로운 국가의 집정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9월 1일, 제국 일본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이시와라 중좌가 보기에 만주는 장차 벌어질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권역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만주국 건국은 일본이 '세계최종전쟁' 승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저항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으로 격렬했다. 관동군 헌병대는 5만 명에 불과했던 항일세력이 만주사변 직후 4배 이상 뛴 22만 명에 달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일본군은 기존 군벌 및 토착 세력을 포섭하고 만주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저항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특히 부농 등 지역 유지들의 세력이 강한 독립적 시장권역 둔(屯)에서의 저항이 완강했다. 둔의 지도자들 중 일본에 포섭되지 않은 이들은 관동군과 만주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고 지역민들을 무장시켜 투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주국의 국방과 치안유지를 담당했던 '만주국군'의 중요성은 빠르게 부상했다. 봉천군벌 잔존 전력을 중심으로 건군됐던 만주국군은 만주지역 내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전개될 중국 화북지역으로의 침략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일본 군부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일본군은 만주국군 양성을 위해 관동군 장교들을 파견하고 교관과 물자를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합격자들 중 일부 선발해 만주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까지 했다.
'일만일체(日満一体)'라는 일본군의 구호 그대로 만주국군은 독립국가의 국방군이 아닌 일본군 대륙침략의 최선봉 부대와도 같았다. 오족협화(五族協和; 일본인, 만주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 등 5개 민족이 어우러져 이상국가를 건설한다는 만주국의 선전문구)의 기치 아래, 만주국군에는 여러 민족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