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령골 유해발굴과정에서 드러난 가로 4.5m, 세로 6m 규모의 숯자리
심규상
김남식씨는 남한 군인과 경찰이 대전에서 후퇴하기 직전 대전 산내학살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 <민족의 증언>(1983, 중앙일보사 발간)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 노동당 직속 유격대원 소속으로 북한 정규군이 한강을 넘기 전에 대전으로 잠입하려고 했으나 행군 코스를 잘못 잡아 정규군 부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대전에 들어갔다'고 밝힌 바 있다.
김남식이 밝힌 '남한 군인과 경찰이 후퇴하기 직전'은 대략 1950년 7월 17일~19일 사이로 짐작된다. 골령골 학살이 7월 16일까지 있었고 북한군은 7월 17일까지 금강 방어선에서 철수해 대전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북한군의 공격은 19일 새벽부터 시작됐고 20일 오후께 대전을 완전히 점령했다. 미군이 완전히 후퇴한 날을 20일로 보면 남한 군인과 경찰은 그보다 먼저 퇴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인과 경찰이 총살한 다음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묻었지만, 북한군이 대전 인근까지 다다르면서 구덩이를 팔 시간적 여유가 없자 총살 후 휘발유로 불태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발굴된 현장에서 나온 유해 등이 김남식씨가 목격한 7월 중순께 희생된 사람들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오마이뉴스> 인터뷰 과정에서 '1950년 6월 말께 총살 후 시신을 장작더미에 던져 불태웠다'는 또 다른 증언이 나온 바 있기 때문이다.
한 현장 목격자는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골령골 산등성이에 올라 숨어서 보니 연기가 새까맣게 나고 사람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첫날엔 장작이 실려 왔고, 그 다음 날부터는 흰옷 입은 사람들을 실은 차가 계속 들어왔다"고 증언했었다.
충남경찰청 소속이었던 변홍명(가명)씨도 1992년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정치범들을 사형목(나무기둥)에 세운 뒤 손을 묶어 총살 후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져 50~60구씩 모아지면 화장을 했다"고 말했다.
발굴단은 유품 분석과 인근 주변 시굴 조사 등을 통해 이런 흔적이 또 있는지, 정확한 살해 시기 등을 검증할 예정이다.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은 지난해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골령골에서 234구의 유해와 5백여 점의 유품을 발굴한 데 이어 올해도 6월 초부터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달 말까지 진행되는 올해 발굴된 유해를 합하면 골령골에서 발굴한 전체 유해는 1000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최소 4000여 명, 최대 7000여 명의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었고, 그들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